이익원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대사헌, 예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성휴(聖休)
학음(鶴陰)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11년(숙종 37)
사망 연도
1776년(영조 52)
본관
부평(富平 : 지금의 인천시 부평)
주요 관직
정언|지평|승지|형조참판|도승지|대사헌|병조판서|우참찬
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헌, 예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부평(富平). 자는 성휴(聖休), 호는 학음(鶴陰). 이이재(李以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세염(李世炎)이다. 아버지는 이정함(李廷咸)이며, 어머니는 한협(韓悏)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통덕랑으로 1738년(영조 1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747년(영조 23) 정언을 거쳐 1748년에는 지평이 되었다. 1749년에는 다시 정언이 되어 효종(孝宗)과 동조(東朝: 수렴청정한 莊烈王后), 대조(大朝)의 휘호(徽號)를 올리는 것을 반대하다 관직이 교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이익원을 구호하다 견책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다시 지평이 되어서는 종친인 여천군(麗川君) 이증(李增)이 자신의 집에 투서가 있어도 급히 보고하지 않은 허물을 들어 절도에 안치할 것을 청했으나, 왕세자가 따르지 않자 취소하였다. 1750년에 다시 정언이 되어 임금의 독단을 간하다 관직이 교체되었으며 4년 후인 1754년에 다시 장령이 되었다.

이후 1756년에 사간이 되어 동궁을 보도하는 내용의 소를 올려 특별히 말[馬]이 하사되고 승지가 되었으나, 양주목사 시절 수어아병(守禦牙兵)의 군사훈련 기일과 관련, 도신(道臣)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장계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760년에 다시 승지가 되어서는 서지수(徐志修)가 대신에게 견해를 묻지 않고 관제(官制)를 변경할 것을 청하자 서지수의 추고를 청하였다.

1761년 7월 수가(隨駕) 당상의 임명과 관련하여 소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서명응(徐命膺)과 함께 파직되었으나, 곧 승지로 다시 발탁되었다. 이듬해인 1762년에는 반교(頒敎) 시에 소리내어 울었다는 이유로 중도부처(中道付處)에 명해졌으나, 곧바로 소결되어 풀려나고 승지에 임명되었다.

이후 약 5년 동안 승지로 있다가 1768년 형조참판에 발탁되고, 1770년에는 도승지가 되었다. 이듬해인 1771년 일찍이 대관(臺官)으로서 역적 여천군(驪川君) 이증에 대하여 발계(發啓)한 공으로 판윤이 되고, 이어 병조판서에 올라 이조판서 박상덕(朴相德)과 함께 도목정사(都目政事: 관리들의 근무 성적에 따라 그 결과를 가지고 관리들의 인사를 처리하던 제도)를 집행했다. 그러나 도목정사가 고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삭제할 것이 논의되기도 했다.

1773년 대사헌을 거쳐 병조판서에 특차되고 내국제조(內局提調)를 역임하던 중에 호피(虎皮)가 하사되는 은전을 입었다. 이듬해에는 대사헌, 예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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