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상(子商). 이요신(李堯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양(李揚)이다. 아버지는 부사 이여택(李汝澤)이며, 어머니는 이홍망(李弘望)의 딸이다.
1660년(현종 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통덕랑으로서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686년(숙종 12) 지평이 되어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관학유생 박성의(朴性義)·이징구(李徵龜)를 변명하는 소를 올렸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관작이 삭탈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는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 체차에 그쳤다.
그러나 곧바로 이이·성혼을 비방하는 유생 조신건(趙信乾)의 상소로 인해 다시금 파문이 일어 오도일(吳道一)·김진구(金鎭龜)의 탄핵을 받고 삭탈되어 문외출송당하였다. 이 해 다시 조정에 들어와 장령이 되었으나, 이상진(李尙眞)을 구호하다 또 다시 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벼슬길이 다시 열려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선발되고 수찬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경연에서 양주(楊州)에 있는 능원대군(綾原大君)의 묘비가 제도에 넘어섰음을 지적하고 합당한 조처를 건의하였다.
한편 기사환국으로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새로이 중전이 되고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의 폐출이 논의되는 사안이 발생하였다.
인현왕후 폐출에 대한 숙종의 의지는 너무도 완강했기 때문에 조신 중에는 왕의 입장을 미온적으로 따르는 계열과 왕후에 대한 예우를 다해야 한다는 계열로 양분되었는데,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이현일(李玄逸)·정시한(丁時翰) 등이 후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역시 인현왕후에 대한 보호론적 입장에서 별궁으로 옮기고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여 각별하게 대우할 것을 주장하다 숙종의 분노를 사서 추고 당하였다. 1690년에는 대제학 민암을 적극 비판했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이일익은 대체로 청남(淸南) 계열에 속하는 인물로서 기사환국 이후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정치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으나, 단명하여 벼슬이 홍문관수찬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