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지의금부사, 공조판서,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옥서(玉瑞)
운강(雲崗)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43년(인조 21)
사망 연도
1729년(영조 5)
본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
주요 관직
공조판서|한성판윤|
관련 사건
이괄의 난|갑술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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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지의금부사, 공조판서,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서(玉瑞), 호는 운강(雲崗). 정언(正言) 이주(李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성(司成) 이창정(李昌庭)이다. 아버지는 이완(李梡)이며, 어머니는 영천 이씨로 이원량(李元樑)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75년(숙종 1)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679년 어제(御題)에 수석, 전시(殿試)에 바로 나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11월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689년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선발되고 정언으로 김석주(金錫胄)의 시호(諡號)를 추탈할 것을 청하였다.

이후 부수찬·부교리·사간·집의·수찬·교리 등 삼사의 직책을 두루 지내고 1690년에 시강원보덕을 거쳐 당상관인 승지에 올랐다. 이 해 충청감사로 나가서는 구황(救荒: 기근 때에 빈민을 구제함)을 위해 조정에 곡식 1만 석을 청하는 등 민생 구제에 노력하여 기여한 것이 많았으나, 민원 처리에 잘못이 있다 하여 추고되기도 했다.

1691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승지에 올랐고,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주필(駐蹕: 왕이 행행하는 도중에 잠시 쉬거나 숙박하던 일)했던 공주(公州)에 비를 세울 것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다소 침체하여 1695년에 강계부사(江界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신속히 부임하지 않아 비난을 받았으며, 부임한 뒤에도 신병이 많다는 이유로 파직이 거론되었으나 유임되었다.

1696년 조정에 들어와 승지에 임명된 이후 1701년까지 대체로 승정원에서 시종하였다.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승진하였다. 1724년(경종 4)에는 공조판서를 거쳐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한성판윤 시절에 늙고 신병이 많아 한성부의 수많은 송사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체직되어 다시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뒤에도 공조판서와 한성판윤을 번갈아 수행하다가 공조판서로서 벼슬길에서 물러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영예를 입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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