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하(子夏). 이요신(李堯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양(李揚)이다. 아버지는 부사 이여택(李汝澤)이며, 어머니는 이홍망(李弘望)의 딸이다. 이여식(李汝湜)에게 입양되었다.
1660년(현종 1)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675년(숙종 1)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선발되고, 다음해 정언을 거쳐 어사에 임명되었다.
어사를 마친 뒤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정언·장령을 거쳐 1677년 다시 홍문록에 선발되었다. 이 해 헌납이 되고, 수찬이 되었다가 다시 헌납이 되었다. 이 때 노비를 혹독하게 형벌한 선비 이익대와 이익대의 아내에 대해서 권대운(權大運) 등이 사형을 주장하였으나, 심단(沈檀) 등과 더불어 사형은 지나치다고 반대하였다.
이 해 6월 송시열을 예의를 오도한 죄인으로 몰고 고묘(古廟: 오래된 사당)를 주장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이후정(李后定)·정지호(鄭之虎) 등과 사직하기를 청하여 체직되었다. 이 해 7월 다시 사간이 되고 이후 집의·부수찬·수찬을 거쳤다.
경신환국으로 물러나 있다가 기사환국 이후 다시 등용되어 1690년에 부수찬, 이듬해 수찬이 되었다. 1692년에는 다시 집의·사간을 거쳐, 우의정 민암(閔黯)의 천거로 승지에 발탁되었다. 갑술환국 이후에는 남인의 실권으로 인하여 관계 진출이 용이하지 못했다.
이일정은 학식이 있어 오래도록 예문관·홍문관 등의 문한직과 경연관·서연관 등의 보도직을 맡았으며, 성격이 강직하여 직언을 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