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때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단양(丹陽). 동지중추부사 이광립(李光立)의 아우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내금위에 보직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여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사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그 공으로 훈련판관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종록(安宗祿)·장린(張遴)·장희준(張凞俊)·김우(金佑)·이충걸(李忠傑) 등과 함께 의병 3,000여명을 모집하여 소위포(小爲浦)에 책(柵)을 설치하고, 후금의 침입군을 맞아 3일간 혈전을 벌인 끝에 많은 적병을 살상하고 승리로 이끌었다.
그 때 가도(椵島: 일명 假島)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의 도독 모문룡(毛文龍)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이정립의 전승을 축하하였으며, 조선조정과 본국정부에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명나라 황제는 은자패(銀子牌)를 내렸고, 모문룡의 주둔지에서도 조총과 탄약·미포(米布)·은화(銀貨) 등을 보내왔다. 전공으로 인산진첨절제사(麟山鎭僉節制使)가 되어 대계도(大鷄島)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죽었다. 1648년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정문이 세워졌다. 1736년(영조 12)에 평안도 유학 계만장(桂萬長) 등이 안주에 있는 충민사(忠愍祠)에 추배할 것을 청한 바 있으나, 『증보문헌비고』 충민사 항(項)에 이정립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현을 보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