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병 ()

이정병의 금파집 중 권수면
이정병의 금파집 중 권수면
한문학
인물
조선 후기에, 형조참판, 한성좌윤, 오위도총부부총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이집(彛執)
금파(琴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59년(영조 35)
사망 연도
1834년(순조 34)
본관
여주(驢州)
출생지
경주 양좌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참판, 한성좌윤, 오위도총부부총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주(驢州). 자는 이집(彛執). 호는 금파(琴坡). 경주 양좌동(良佐洞) 출생.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증직된 이헌백(李憲百)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통덕랑(通德郎) 신집(申潗)의 딸이다. 유치명(柳致明)에게 수학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83년(정조 7)에 동당회시(東堂會試)에 합격했고, 1786년(정조 1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그 뒤 휘릉별검(徽陵別檢)·원릉별검(元陵別檢)에 임용됐으며 1790년(정조 14)에 의령고주부·병조좌랑이 됐다. 1794년(정조 18)에는 사헌부지평을 지냈고 이듬해에 사간원정언을 지냈는데, 이때 수궁대장이 근무에 태만하자 그 죄를 물어 처벌할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1796년(정조 20)에 병조정랑, 이듬해에 홍문관수찬 겸 경연검토관이 되어 이언적(李彦迪)이 지은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왕에게 바쳤고, 다시 현풍현감으로 나갔다. 1807년(순조 7) 홍문관부교리가 되어 군심을 바르게 할 것을 상소했고 이듬해에 능·종묘의 축문과 숭인전(崇仁殿)의 제문·기우문 등을 지어 바쳤다.

1812년(순조 12)에는 통례원상례가 되어 동궁의 입학을 주관했다. 1814년(순조 14)에 사헌부집의·성균관사성이 됐고, 1816년(순조 16)에 병조참지·동부승지·우승지, 그리고 이듬해에 풍천부사가 되어 환곡 만석을 경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뒤 1825년(순조 25)에 돈녕부도정이 되었고, 1833년(순조 33)에는 형조참판·한성좌윤·동지돈녕부사에 임용됐으며, 이듬해에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올랐다. 그 뒤 벼슬에서 물러나 후진교육에 전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금파문집(琴坡文集)』 6권 3책이 있다.

참고문헌

『금파문집(琴坡文集)』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