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보(公輔). 종실 오성수(烏城守) 이신손(李神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풍양령(豊陽令) 이춘(李春)이다. 아버지는 이몽상(李夢祥)이며, 어머니는 남상덕(南尙德)의 딸이다.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1년 정언, 이듬해 헌납이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의 침입을 받게 했다 하여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책임을 추궁, 파직시켰다.
임실현감인 아버지가 전라도관찰사 이광전(李光殿)의 후장(後將)으로 진중에 있음을 듣고 아버지 곁에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가 거절당하였다. 1594년 선천군수에 이어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어, 민심을 수습하고 선정(善政)하였다 하여 1598년 전주부윤에 영전하였다.
1600년 해임된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을 지나치게 공박하다 선조의 노여움을 사 북도에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동부승지가 되고 이어서 나주목사·광주목사(廣州牧使)·용양위호군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610년(광해군 2)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12년 의주부윤으로 재직 중 다시 충청도관찰사로 전임되고 1615년 사은사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8년 은(銀)의 채광 임무가 막중한데도 단천군수가 되어 임무를 잘 수행하였다.
인조반정 후 1625년 김해부사로 재직 때, 언양(彦陽)의 거부 신전(辛荃)의 재산을 노리고 신전의 딸을 처로 삼아 협박하여 재산을 차지하였다는 이유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