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언 ()

근대사
인물
개항기 때, 상의원직장, 성균관전적 등을 역임하였으며, 을미사변 이후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국권 피탈 이후 단식을 거행하여 자결한 문신 · 의병장 · 열사.
이칭
중관(仲寬), 문석(文錫)
이칭
소자(小字)
동은(東隱)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0년(철종 1)
사망 연도
1910년(순종 3)
본관
진보(眞寶,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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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개항기 때, 상의원직장, 성균관전적 등을 역임하였으며, 을미사변 이후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국권 피탈 이후 단식을 거행하여 자결한 문신 · 의병장 · 열사.
개설

본관은 진보(眞寶). 아명은 문석(文錫). 자는 중관(仲寬). 호는 동은(東隱). 경상북도 안동 출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이만우(李晩佑)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김진두(金鎭斗)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뒤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880년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1882년 정국이 혼란하자 봉화의 임당산(林塘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1895년 8월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시해가 자행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도현(金道鉉)이 안동·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창의하자 이에 가담하여 전방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강제병합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집 밖에 좁다란 방 한칸을 마련하고 외부와 접촉을 끊고 때때로 을사조약 체결 때 상소하였던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선조의 사당과 묘를 참배한 뒤 수십 일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 무렵 일본경찰 몇 명이 와서 음식을 먹도록 권하라고 식구들을 협박하자, 때마침 베개를 의지하고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벼락같은 호령을 하고 나서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똑바로 앉아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기암유고(起巖遺稿)』
『기려수필(騎驢隨筆)』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 광복출판사, 1983)
「벽산선생창의전말」(『독립운동사자료집』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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