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의 육진 개척으로 동북 지방의 여진족에 대한 경략은 대체로 큰 문제가 없이 유지되어왔다. 그러나 중종 이후 내정이 문란해짐에 따라 북방에 대한 통제력도 차츰 기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틈을 타 여진족이 준동하기 시작해, 자주 국경을 침범하며 약탈행위를 자행해 변장(邊將)을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그들을 토벌하기 위한 출병론(出兵論)이 대두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반대론자에 의해 실행되지 못하고 계속 소극적인 회유책으로 일관해 오던 중 1583년 마침내 ‘이탕개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이탕개는 선조 초 우리 나라에 귀화한 여진인으로, 육진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관록과 여러 가지 후대를 받아온 자였다. 1583년 경원부에 사는 번호(藩胡 : 오랑캐)들이 전의 진장(鎭將) 허물을 이유로 가지 가지 말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해 난을 일으키자 반기를 들고 이에 호응해 난을 일으켰다.
이에 경원부사 김수(金燧)가 나아가 싸우다 패하자 여진인들은 부성(府城)을 점령, 인마를 약탈하고 계속해 아산보(阿山堡)·안원보(安原堡) 등 부내(府內)의 모든 진보(鎭堡)를 점령함으로써 기세가 대단하였다.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오운(吳澐)·박선(朴宣)을 조방장(助防將)에 임명해 용사 8,000 명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또 정언신(鄭彦信)을 도순찰사에, 이용(李0x9B4E)을 남병사에, 김우서(金禹瑞)를 방어사에 임명하는 한편, 경기 이하 5도에 명해 군사를 징발해서 북쪽으로 나가게 하였다.
이 때 북병사(北兵使) 이제신(李濟臣)의 책응(策應)으로 반호(叛胡 : 반역을 꾀한 오랑캐) 토벌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온성부사 신립(申砬)은 훈융진첨사(訓戎鎭僉使) 신상절(申尙節)과 함께 훈융진을 포위한 적을 격파하고 적의 머리 50여급을 베고 계속해서 강 건너까지 추격하였다.
경원부사 김수도 적의 머리 40여급을 베어 스스로 속죄하려고 강 건너까지 따라갔다. 그러나 이제신이 이미 장사(將士) 김우추(金遇秋) 등을 보내어 적의 소굴을 쳐서 싸움이 끝난 뒤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난은 진압되고 육진은 전과 같이 보존되었다. 그러나 경원부성 함락의 책임을 물어 북병사 이제신은 귀양가서 죽었고, 경원부사 김수와 판관 양사의(梁思毅)는 진(陣) 앞에서 참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