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삼(子三), 호는 삼산(三山). 이색(李穡)의 후손이며, 이정기(李廷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행(李涬)이고, 아버지는 참봉 이병철(李秉哲)이며, 어머니는 박태상(朴泰尙)의 딸이다.
이희조(李喜朝)의 문인으로 1717년(숙종 4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30년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5년(영조 6) 지평으로, 신임사화 때 화를 입은 노론 4대신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주장하다가 분당을 일삼는다는 탄핵을 받아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고, 그 이듬해에 영암으로 이배되었다.
그 뒤 양사·세자시강원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740년에 다시 지평이 되어 좌의정 유봉휘(柳鳳輝), 영의정 조태구(趙泰耉)의 관작을 추탈할 것과 당시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왕(王)’자 산맥(山脈)에 쓰고 나서 지사(地師)에게 누설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죄를 들어 파직시킬 것을 주청하다가 도리어 갑산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대신들의 주청으로 풀려나와 부교리·황해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부제학·호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삼산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