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곡(蒼谷)·쌍산(雙山). 이귀지(李貴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희백(李希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이대수(李大秀)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장사랑 홍질(洪礩)의 딸이다.
1595년(선조 2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보직되고, 평안도평사·지평 등을 거쳐 수찬·교리·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 (광해군 2) 헌납이 되었다가 교동현감으로 나갔다. 그 때 인척인 이이첨(李爾瞻)으로부터 그곳에 유배중인 임해군(臨海君: 광해군의 형)의 암살을 종용받았으나 이에 불응해 미움을 받아 투옥되었다.
이듬해 다시 부수찬으로 기용된 뒤 서흥부사·예빈시정·봉상시정·필선 등을 역임하고, 161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1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대북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은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사간에 등용, 1624년 경기도관찰사, 1625년 예조와 형조의 참판 및 대사헌, 1626년 이조참판, 1627년 동지중추부사, 1629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부제학·도승지·참찬관 등을 역임하고, 1632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자 행호군으로 산릉도감(山陵都監)을 겸하였다. 이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대사헌, 예조·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사직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양근(楊根)에서 의병을 일으켜 후금의 군사와 싸웠다. 이듬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못한 것을 자책해 사퇴했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642년 청나라 용골대(龍骨大)가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볼모로 삼아 심양(瀋陽)에 잡아놓고 조선 사신의 입국을 요구하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심양에 가서 한달 동안 감금되었다가 돌아오던 중 평양에서 죽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