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승춘(承春). 황해도 장연 출신. 1920년 12월 향리에서 최창한(崔昌翰)·이기춘(李起春)·김경선(金敬善) 등과 함께 동지를 규합해 독립단(獨立團)을 조직하고 군자금 모금 및 기타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타도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1921년 1월 11일, 최창한·이기춘과 함께 장연군 목감면 의산리의 곽수(郭琇)의 집으로 갔다. 자신은 망을 보고 이기춘과 최창한이 들어가 군자금을 요구했으나 현금 120원을 내놓자 소액이라고 받기를 거부하고 나왔다.
그해 3월 20일 장연군 전택면 종현리에서 이윤철(李潤哲)을 권총으로 위협하고 군자금을 요구했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전택면 비석포리의 이응엽(李應燁)의 집으로 가서 자신은 망을 보고 다른 두 명이 집안으로 들어가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달 9일에는 김병순(金炳淳)의 집으로 군자금을 요구하기 위해 갔다가 잠복 중이던 스스키[鈴木佐吉] 등 수 명의 장연경찰서원들에게 잡힐 뻔하였으나 무사히 피신하였다. 그리고 군자금 모금에 불응한 손정훈(孫鼎薰)과 이응엽의 집에 각각 불을 질러 일부를 소각시켰다.
1922년 만주로 망명해 산둥성[山東省] 옌타이[煙臺] 및 톈진[天津]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1924년 3월 초순 상하이[上海]에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한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6년에는 톈진의 프랑스 조계(租界) 내에 있는 공원에서 나석주(羅錫疇)와 회합해 서울에 있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1927년 5월 북경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1928년 7월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광복 후 감찰위원회 감찰국장, 대한해운공사 상임감사 등을 지냈으며, 제2대 광복회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1978년 3월 2일 세상을 떠나자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