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룡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시은(時殷)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2년(고종 9)
사망 연도
1948년
출생지
경기도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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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이명은 시은(時殷). 경기도 안성 출신.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복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의병으로 전신하여 여주·원주 등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1919년 3·1운동 때는 안성 일대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안성군의 경우 처음에는 원곡면과 양성면에 별도로 만세시위가 일어났지만, 4월 1일에는 두 면이 합동으로 시위를 벌여 대규모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날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 등과 함께 원곡면사무소 앞에 1,000여 명의 군중을 모아놓고 독립만세를 선창한 뒤 시위행진, 일본경찰주재소를 습격·방화하였다.

다음에는 우편소에 들어가 집기와 서류를 파손하는 한편, 전신주를 넘어뜨리고 전화선을 절단하여 통신을 두절시켰으며, 면사무소에서는 호적부를 소각하고 기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일본경찰들을 붙잡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이 날의 격렬한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그 뒤 1920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건조물 소훼·손괴, 기물손괴, 주거침입, 강도, 소요, 전화법위반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1921년 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9(국가보훈처, 1991)
『독립운동사자료집』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독립운동사』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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