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성남리 고분군 ( )

선사문화
유적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낭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앞트기식 돌방무덤 · 굴식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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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낭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앞트기식 돌방무덤 · 굴식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1986년도 익산군 문화재(현, 국가유산) 지표조사 때 발견된 유적으로, 발견 당시 대부분의 고분은 자연적인 토사의 유실과 인위적인 도굴로 인해 파괴된 상태였다. 발굴조사는 1994년 12월 22일부터 1995년 6월 9일까지 원광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실시되었다.

고분군은 성남리 외성부락의 동쪽 맞은편 나지막한 구릉성 야산에 있다. 고분이 분포한 야산의 지형은 미륵산에서 북으로 뻗은 지맥의 말단에 해당하며, 남북으로 능선이 형성되어 있어, 고분은 야산의 정상에서부터 남사면과 서사면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이 고분군에서 조망하면, 서쪽으로는 평야가 함열(咸悅)을 거쳐 금강(錦江)쪽까지 펼쳐져 있고, 서쪽을 제외한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곳이 산지와 평야가 만나는 접경이 되고 있다.

내용

조사된 고분은 28기에 달한다. 조사 결과,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고분의 축조석재가 결실되어 정확한 구조파악이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잔존상태가 양호한 고분과 비교함으로써 어느 정도 구조를 알 수 있었다.

석축묘는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과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으로 나눌 수 있으며, 움무덤의 경우는 시간적 차를 두고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 백제 말기의 판석조 중앙연도의 굴식 돌방무덤이다.

굴식 돌방무덤은 대체로 능선의 서사면에 분포하고 있다. 석실은 대부분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장축방향은 능선의 서편에 위치한 고분은 산경사와 직교를 이루어 대체로 남북방향이고, 동사면에 위치한 고분은 산경사에 평행한 동서방향이다. 축조석재는 거의 모든 고분이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가공한 판석을 이용하고 있다.

벽의 축조법은 뒷벽의 경우, 상부의 모서리를 벽체의 상부에서 내경된 각도만큼 가공한 1매의 판석만을 세운 것과, 하단에 방형의 석재를 놓고 그 위에 가공한 석재를 올려 놓은 것이 있다.

장벽은 기본적으로 3∼4매의 판석을 직각으로 세워서 벽을 만들고 그 위에 장대석을 횡으로 쌓아올려 내경시키고 있다. 바닥은 판상형의 석재 또는 할석을 깔은 것과 생토층을 정면해 사용한 것으로 구분된다.

연도는 대부분 남쪽 단벽의 중앙에 시설되어 있다. 양 장벽의 남쪽 끝에 문주석을 세워 폭을 좁힌 뒤, 문주석 하단의 사이에 장대석으로 가로 끼워 문지방석으로 삼았다.

문주석 위에는 상부의 모서리를 좁게 가공한 문미석을 올려 내경석, 천장석과 가구하고 있다. 연도의 평면형태는 대체로 八자형으로 넓게 퍼지도록 축조하고 있다. 연도의 폐쇄는 판석 1∼2매로 석실 입구를 폐쇄한 뒤 그 밖으로 석재를 기대어 세워서 견고하게 하였다.

석실의 위치가 대체로 지하에 있는 관계로 시신 납입의 편리와 고분축조의 효율성을 기하고자 묘도를 시설하였다. 묘도는 연도 폭과 거의 같은 규모이고 바닥은 바깥쪽이 높고 석실의 안쪽으로 낮게 기울어져 있다.

유물은 관정, 관고리가 발견되어 목관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 다른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점은 박장풍습(薄葬風習)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말기의 가장 전형적인 횡혈식석실분은 잔존하는 상태가 완벽한 2, 3, 14, 16호분 등이다. 이들 고분은 백제 말기 괴임식천장고분의 정형을 보이고 있다.

곧 평면형태, 축조석재의 가공방법, 연도의 위치 등 모든 속성에서 부여 능산리고분으로부터 비롯되는 석실분의 형식으로 판단된다.

익산 일원에서 발견되는 동일 유형의 고분은 익산 쌍릉(益山 雙陵), 익산 원수리고분(源水里古墳), 봉동 둔산리고분(鳳東 屯山里古墳)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백제시대 고분은 축조양상으로 보아 7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들 고분의 피장자는 미륵사(彌勒寺)와 관련 지워 이 지역에 형성되었던 유력한 집단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주로 동사면에 분포하고 있다. 장축은 산경사와 평행한 동서방향이다. 규모는 굴식 돌방무덤보다 작고, 축조수법과 석재에 있어서는 횡혈식석실분의 경우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벽체는 상부의 폭을 좁혀서 축조하였다. 뒷벽은 대체로 1∼2매의 작은 판석을 직각으로 세우고, 장벽은 하부에 방형의 5∼6매의 소형 판상석을 세운 뒤 그 위에 부정형 내경석을 올려 천장석과 가구하고 있다.

바닥은 모두 부석시설 없이 생토층을 정면해 사용하고 있다. 입구부는 단벽을 이용해 시신을 납입한 뒤, 1∼2매의 판석으로 폐쇄하였다. 유물은 일부에서 관정이 발견되어 목관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제 말기에서 고려시대 전까지에 걸쳐 조성된 고분은 제5·6·7·7-1호분으로 생각된다. 이 고분들은 백제 고분보다는 축조석재나 규모에서 작은 편으로, 입구를 문주석 없이 판석으로 단순히 폐쇄한 앞트기식 돌방무덤으로서 백제 말기의 돌방무덤보다 늦은 시기에 축조된 고분이다.

그리고 제21호분은 백제고분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엉성한 축조기술, 낮은 천장, 바닥의 부식토 정면과 특히 횡구부를 둔 점에서 고려시대의 횡구식석곽분으로 보인다.

또한 제17호분은 축조석재나 고분의 구조에서 백제시대 고분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지만 조선 초기에 조성된 횡구식석곽분으로 생각된다.

의의와 평가

익산 성남리고분군의 중심연대는 7세기 중엽경에 해당하며 그 피장자는 금마(金馬) 일원의 백제 말기 유적과 관련된 집단으로 상정할 수 있다.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7세기 중엽 이후에도 백제시대 고분전통이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어, 전형적인 구조적 특징 중 일부가 축약과 변형을 거쳐 조선시대의 석곽분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익산성남리백제고분군』(원광대학교박물관·익산시, 1997)
집필자
문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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