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의 총 높이는 320㎝이며. 무석 2구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240㎝×70㎝의 크기이다. 1979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신도비 건립연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신도비는 현재 비각 안에 보호되고 있는데, 대리석으로 만든 이수와 비신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방형의 비좌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이수의 앞면에는 반룡(蟠龍)이 조각되어 있고, 옆면과 뒷면에는 구름무늬가 양각되어 있으며, 비문은 비신의 앞면에만 나타나 있다.
비좌는 6매의 판석을 조립하여 만든 지대석(地臺石) 위에 있는데, 상 · 하부에 방형의 2중 구획을 긋고 가운데에 연주문(連珠文)을 새겼으며, 상부 양쪽에는 안상(眼象)을 새겼고, 하부는 12개의 연판(蓮瓣)으로 장식하였다.
비문은 조익(趙翼)이 찬(撰)하고 오준(吳竣)이 썼으며, ‘益城君神道碑銘(익성군신도비명)’이라 쓰여있는 두전(頭篆)은 여이징(呂爾徵)이 전서(篆書)를 썼다.
무석(武石)은 신도비의 동북쪽 30여m 거리에 위치한 익성군의 묘소 앞에 있다. 익성군 묘소에는 무인석 외에도 묘비, 상석, 석주 등이 배치되어 있고, 봉분 주위는 판석이 둥글게 둘러져 있다.
묘의 전면 양쪽에 위치한 무석 2구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무인이 양손을 가운데로 모아 칼을 휘어잡고 있는 형태로서, 당시 무인의 의상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신도비의 주인공 익성군(益城君)은 본명이 이향령(李享齡)이고, 자는 수원(壽元)이며,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손자이다.
13세 때에 익성정(益城正)이 되고, 그 후 도정(都正)이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행행(行幸)하자 익성도정이 하원군을 모시고 행재에 다다르니 선조가 아름다이 여기고 1596년(선조 29)에 정의대부(正義大夫)를 가하고 익성군에 봉하였다.
선조의 세자 순화군(順和君)이 아들이 없어 익성군의 제3자 진릉군(晋陵君)을 그 후사로 삼았는데, 1621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일어나 진릉군을 추대하였다는 이이첨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이에 진릉군은 곧 사사되고 익성군은 거제로 귀양가게 되니 귀양지에서 3년만에 병사하였다. 그러나 여러 아들이 모두 죄적(罪籍 : 죄인이 죄를 지은 정상을 적은 명부)에 있어 장사를 지낼 수 없자 임시로 전북 익산군 왕궁면 용화리(화곡)에 묘소를 설치하였다가, 1643년(인조 21) 1월 24일 은진면 용산리 현재의 자리로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