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 필사본. 유성룡(柳成龍)의 셋째 아들인 저자가 임진왜란을 만나 피난 생활을 하며 체험한 일들을 일록 형식으로 쓴 수기작품(手記作品)이다. 유진의 만년인 53세 때 지었다. ‘壬辰錄(임진록)’이라는 표제의 선장 필사본(線裝筆寫本)에 「임ᄌᆞ록」·「슈암션ᄉᆡᆼᄒᆡᆼ쟝」과 합편, ‘임진녹’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원본의 상태가 훼멸될까 두려워 1849년(헌종 15)에 후손이 이를 다시 베껴 그 종택에 보관해 온 전사본(轉寫本)으로 전하고 있다.
작품 끝에 “병이 들어 누워 있으니 어느 때 죽을는지도 모를 일이니 후손들에게 임진란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고, 내가 그렇듯 신고(辛苦)하여 죽다가 살아났음을 전하기 위하여, 일가 사람이라도 이야기삼아 보도록 하기 위하여 이를 기록하여 둔다.”고 덧붙여 지은 뜻을 밝히고 있다.
유진이 열한 살 되던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유성룡은 왕을 호종해 서행(西行)길에 오른다. 유진은 종매부인 이문영(李文英)을 따라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풍양·양주·영평·포천· 가평·양근 등지를 지나 강원도 화천·김화 등지와 평안도의 평양 근교에 이르러 아버지를 만나려 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다시 은산·영유·안주·가산 등지로 내려와 황해도 수안을 거쳐 서울로 되돌아오기까지의 열한 달 동안에 겪은 피난 생활을 소상히 적고 있다. 또한 그 이듬해인 1593년 3월 여러 식구들과 해후한 기쁨과 반가움을 되새기고 있다.
이 작품은 피난길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일과 어려움을 만나면 슬기로써 극복한 일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당시의 시대 상황과 사회상을 비롯해 백성들의 인심소재(人心所在)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왜병의 만행과 잔학상을 적나라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의 민족적 치욕을 되새기고 일깨워 주게 하는 작품이다.
구사된 말씨의 예스러움이나 말투의 지역적 특성 등을 잘 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초의 안동지방 말을 그대로 담아 내려오므로 말씨의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 뿐만 아니라 사실적인 내용과 생동적인 표현, 생생한 묘사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자조적인 수기 문학의 백미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