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능은 경기도 광주(廣州: 현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소재)에 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5월 초 한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해 9월 점령지역에 있던 두 능을 파헤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실은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이 관찰사 성영(成泳)의 서신을 받고, 다음 해 4월 장계를 올림으로써 세상에 밝혀졌다. 유성룡은 왜군이 서울을 철수하기 전인 4월 16일 밤에 군관과 사노(私奴) 등 10여 명을 이끌고 두 능을 비밀리에 살펴보고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6년(선조 39) 대마도의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뜻이라 하여 사신을 보내어 수호할 뜻을 전하여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두 능을 파헤친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화의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범릉한 죄인을 잡아보내야 된다는 것이 국교회복을 위한 중대한 조건이 되었다.
그래서 “범릉한 죄인을 결박지어 보내라.”는 답서를 첨지 전계신(全繼信)에게 주어 일본에 보내도록 하였다. 이에 오랫동안 국교의 회복만을 갈망하던 대마도에서는 마다화지[麻多化之]와 마고사구[麻古沙九]라는 2명을 범릉적으로 잡아보냈다.
이들을 심문한 결과 이 두 사람은 임진왜란 당시 13세와 23세였으며, 마고사구는 부산까지는 왔으나 상륙도 안 하였으므로 진범으로 단정할 수 없다 하여 의논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범인 2명을 참수하고 명나라에 이를 알리는 한편 일본의 화의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