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봄 양수장 건설공사 중 속칭 합산의 서북쪽 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재령평야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평탄한 구릉지대에 있다. 남쪽으로 200m 거리에는 봉토(封土)가 거의 없어진 2기의 벽돌무덤[塼築墳]이 있다.
이 토광묘는 지하 2m 깊이에서 무덤의 바닥이 나타났는데, 양수장 건설을 위해 기초터파기작업을 할 때에 파괴되어 완전한 규모는 알 수 없었다. 유물들은 길이 2m, 너비 1m 정도의 범위에서 수습되었다. 수습된 유물로는 세형동검(細形銅劍) 1점, 투겁창[銅矛] 1점, 쇠칼[鐵刀] 1점, 쇠도끼[鐵斧] 1점, 쇠끌[鐵鑿] 1점, 관형동기(管形銅器) 1점, 일산대꼭지 1점 등 다수의 철제 및 청동제품들이다.
출토 당시의 유물배치모습은 무덤 바닥의 중앙부에서 약간 오른쪽에 치우쳐 긴 쇠칼이 있었고, 세형동검과 투겁창은 이 쇠칼의 안쪽으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쇠칼과 동검·투겁창의 끝은 모두 서남쪽을 향해 있었다. 바닥의 북쪽 모서리에는 쇠도끼[鐵斧], 쇠고리[鐵環] 등의 철제품이 놓여 있었으며, 그 남쪽 모서리 부근에는 관형동기·이형동기가 놓여 있었다. 덧널[槨]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유물배치상태로 보아 철제품이 놓여 있는 위치가 덧널의 북쪽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출토유물 중 투겁창의 자루가 끼이는 부분에는 7자 가량의 한자가 양각되어 있는데, 완전한 판독은 어려우나 ‘□□□□황조용(皇朝用)’이 새겨져 있다. 이 무덤을 조사한 사람들은 이 글자의 내용으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이 왕실에 복무한 왕의 측근자였거나 공신으로 보고 있으며, 아울러 서기전 2세기 후반경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