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무관이었으나 문자를 해득하지 못하였다. 창주첨사(昌洲僉使)가 되었으나 학문을 알지 못한 탓으로 병영의 중요한 장보(狀報) 등을 군관에게 맡겨야만 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문자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글을 아는 진리(鎭吏)를 스승으로 삼아 『사략(史略)』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하루에 열번씩 익히는 등 열심히 면학한 결과 3개월 만에 전질(全帙)을 떼었다.
이어서 『자치통감』을 배워 익히니 1년 뒤에는 놀랍게도 중앙과 왕래되는 장보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때마침 그곳을 순회하던 어사 이재(李縡)가 그러한 사실을 전해듣고 그를 불러본바, 풍의(風儀)도 늠름하고 담론도 훌륭한 데 깊이 감탄하여 조정에 추천, 벽동군수로 영전되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그가 어사와 강계부사에게 짐승의 가죽과 인삼 등을 주어 엽관운동을 하였다고 모함을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그것이 모함이었음이 드러나 다시 벽동군수에 복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