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별의 빛깔이나 위치로 길흉을 점치는 술법이다. 점성술은 고대 바빌로니아와 중국에서 널리 퍼졌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 영향을 받아 점성술이 생겨났다. 천문현상으로 운명을 미리 알아내고자 하는 이 점성술, 즉 예언은 위정자(爲政者)가 가장 신경을 쓰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점성술을 제왕의 학(學)이라고 보았다. 즉, 동양적인 전제주의 밑에서 점성술은 군주에게 봉사하는 학문으로 발생하였고, 군주만이 그 지식을 사용하는 자유를 독점하고 있었는데,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성술은 일반 국민에게도 퍼졌다.
점성술은 방법과 용도에 따라 국가의 일을 점치는 것과, 서민과 가까운 개인의 운수를 점치는 일로 구분된다. 앞의 것을 천변점성술(天變占星術), 뒤의 것을 숙명점성술(宿命占星術)이라고 한다.
천변점성술은 천변에 의하여 땅 위의 현상을 점치는 것인데, 천변은 넓은 지역 어느 곳에서나 생기는 일이므로 천하국가적이라는 뜻에서 위정의 학이라 하였다. 옛날 제왕들은 국태민안에 주력을 두었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두려워하였다. 조금이라도 새로운 천문현상이 나타나면 제왕은 점성술사를 불렀다. 그 때문에 점성술사는 제왕의 정치고문으로 신하로서의 발언권도 강하였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역대 군주는 천문현상에 항상 유의하였다. 이 천문현상을 당시에 나타난 지상현상과 아울러 자세히 기록하여 같은 현상이 일어났을 때 점성술에 적용할 준비를 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풍부한 관측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이러한 관측기록은 『고려사』 · 『조선왕조실록』 등에 많이 실려 있다. 점성술은 천문학과는 다르지만 근세 이전의 천문학의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과학지식, 특히 천문학이 발달되면서 점성술은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점성술 때문에 많은 관측 기록이 남기는 하였지만, 점성술이 천문학의 발달에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연금술(鍊金術)이 화학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과는 다르다.
점성술과 천문학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으면서 성격이 전혀 다르다. 점성술은 천문현상의 관측에서 출발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학은 제1의 과학이고, 점성술은 그 응용으로서 제2의 과학이라 하였다. 점성술로 생활비를 벌어 쓰면서 천문학을 연구한 케플러는 말하기를, “점성술은 천문학의 어리석은 딸이지만, 그 딸이 화류계에 나서서 벌어 온 돈으로 어버이가 되는 천문학을 먹여 살린다.”라고 하였다. 점성술이 천문학 발전을 뒷받침한 예이다.
천문법칙이 자세히 알려질수록 점성술사의 권위는 떨어져 갔다. 정치고문으로, 왕의 비서로, 재상들도 두려워하던 점성술사는 천문학의 발달에 따라서 기운을 잃고 제왕의 옆을 떠나 길가의 점쟁이로 떨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