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은 우주의 구조, 천체의 현상, 다른 천체와의 관계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순환하는 천문현상을 바탕으로 시간을 나누는 역법을 만들었고, 순환 속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 속에서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점성술이 발달하기도 하는 등 역사가 오랜 학문이다. 전통시대에 우리 천문학은 주로 중국에서 천문역법을 도입·소화하면서 발전했는데 우리 나름의 창조성을 발휘한 예도 없지 않았다. 특히 세종 재위기간의 발전이 눈에 띈다. 우리 역사서에는 천문에 관한 기록이 매우 많은데 천문과 기상을 묶어서 기록하거나 과학과 점성이 혼재해 있다.
현재 민간에서는 전래되어 오는 몇 개의 별자리 이름이나 그에 얽힌 전설, 또는 몇 개의 별의 이름이나 미리내라고 하는 은하수에 대한 고유명들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나라에도 중국의 천문사상과는 관련이 없는 특유한 천문학적인 지식이 발달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라든지 고분벽화 등에 그려진 그림, 그 밖의 물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중국 천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는 아주 일찍부터 중국 천문학에 대한 지식이 도입되었고, 그 영향 아래에서 천문학이 발달되어 온 것이라고 추측된다. 우리 고유의 천문 지식에 관한 흔적이 다른 비슷한 나라에 비해 더 적은 것도 그만큼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우리 고유의 것이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나라 천문학이 걸어온 자취에 우리 나라 특유의 특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갖가지 천문역법을 도입, 소화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우리 나름대로의 창조성을 발휘한 일도 없지는 않았다. 이제 연대 순서에 따라 우리 나라 천문학이 걸어온 발자취를 추적해 보기로 한다.
고구려 때의 고분으로 무용총(舞踊塚)을 비롯한 몇 개가 발굴되었다. 이들 고분벽화에는 창룡(蒼龍) · 주작(朱雀) · 백호(白虎) · 현무(玄武)의 사신도(四神圖)와 태양과 달을 상징하는 금오(金烏)와 섬여(蟾蜍의 그림, 삼원(三垣), 28수(二十八宿)로 된 성수(星宿)의 그림 일부 등이 남아 있다.
이러한 그림에서 고구려가 일찍부터 중국의 천문사상을 도입하여 이미 생활화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또 일본에서 발굴된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이나 그 후손의 것으로 추측되는 고분벽화에도 나타나 있다. 이는 우리 나라의 오랜 옛날 사람들이 일본의 천문학에 끼친 영향을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
천문현상의 관측기록으로는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 고구려본기 · 백제본기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 많다. 주로 일식(日食) · 혜성(星孛, 彗星, 蚩尤旗, 長星) · 유성(流星) · 유성우[星隕如雨] · 운석[星落] · 객성(客星:瑞星이나 女夭星의 출현)과 5개 행성(行星)의 달에 의한 엄폐(掩蔽:太白犯月, 土星入月 ……), 금성의 주현[太白晝見] 등에 관한 기록으로 다분히 점성학적(占星學的)인 의미를 갖는 현상의 관찰기록이다.
이러한 관찰기록의 수는 신라가 108개, 고구려가 25개, 백제가 53개로 되어 있다. 통일 이후 신라의 기록 때문이기도 하나, 고구려의 기록 수는 너무 적다. 병란에 의한 사료의 일실(逸失)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삼국유사』 기이(紀異)와 신주(神呪)에도 각각 유석(流石) · 운석(隕石)에 대한 기록과 혜성(彗星)에 대한 기록이 한 항씩 들어 있다.
삼국시대에 사용되었던 역법(曆法)을 보면 고구려 광개토왕비 비문의 연대는 중국 북위(北魏)의 역으로 기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624년(영류왕 7)에 당나라에서 역서를 구했다고 하는데, 이 역법은 확실하지 않다.
백제는 『주서(周書)』에 의하면 송나라의 하승천(何承天)이 편찬한 『원가력(元嘉曆)』을 썼음이 확실하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545년(성왕 23)에 역박사(曆博士) 고덕(固德) 왕보손(王保孫)을 일본에 보냈으며, 602년(무왕 3)에도 승려 관륵(觀勒)이 역본(曆本)과 천문서를 일본에 전했다고 하는데, 이때 전한 역법도 『원가력』으로 추측되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에 나타난 연대도 『원가력(元嘉曆)』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역박사와 천문박사(天文博士)가 일본에 교대제로 건너가서 천문과 역의 일을 맡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674년(문무왕 14)에 대나마(大奈麻) 덕복(德福)이 당나라에 건너가 역법을 배워서 돌아온 후 이 역법으로 고쳐 썼다고 하는데, 이 역법은 당나라의 이순풍(李淳風)이 편찬한 『인덕력(麟德曆)』이 틀림없다고 추측된다.
그 뒤에 당나라의 승려 일행이 지은 『대연력(大衍曆)』을 썼고, 또 당나라의 서앙(徐昻)이 지은 『선명력(宣明歷)』을 도입, 사용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선명력』은 고려에서도 충선왕 때까지 거의 500년 가까이 사용한 역이다. 신라 통일 이후 일본의 역법이 신라를 통해서 전달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선명력』은 신라가 아니고 발해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에서 통일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그렇게 밀접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의상(儀象)에 대해서는 경주에 첨성대(瞻星臺)가 남아 있어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나, 그 밖에는 몇 개의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평양성(平壤城) 안에 9묘(九廟)와 9지(九池)가 있는데, 그 못가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조선 세종 때까지는 고구려의 첨성대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문도(天文圖) 석본(石本), 즉 석각천문도(石刻天文圖)도 평양성에 있었는데, 고려 말의 병란 때 대동강에 빠져서 없어졌다고 한다. 이 두 가지 기록만으로도 고구려의 천문학 수준이 신라에 못지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주에 현존하는 신라 첨성대는 일명 점성대(占星臺)라고도 하는데, 선덕여왕대(632∼647)에 축조된 것으로 맥주병과 같은 모양인 원통부(圓筒部) 위에 정자석(井字石)을 얹은 상방하원(上方下圓)의 구조이다. 높이 약 9.5m로 중간에 출입구가 있어서 그로부터 내부를 통하여 위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이 위에서 주로 점성적(占星的)인 관측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692년(효소왕 1)에는 승려 도증(道證)이 중국에서 돌아와 천문도를 바쳤다. 그리고 718년(성덕왕 17)에 비로소 누각(漏刻)을 만들었다. 그러나 병란으로 없어진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백제에 어떠한 천문기구가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현재 기록도 유물도 남아 있지 않다.
한편, 삼국시대에 각 나라에서 천문역법을 관장하는 관서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문헌기록이 거의 없어서 알 길이 없다. 고구려에는 일자(日者)라고 한 기록이 있고, 백제에는 『주서』에 일관부(日官府)라는 관청이 있었다는 기록과 따로 역박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 있다. 신라에도 누각박사(漏刻博士) · 천문박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이렇게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앞의 여러 가지 사실과 당시 중국의 사정이나 고려시대의 제도에 비추어 볼 때, 삼국은 다 그 나름대로 천문역법을 관장하는 관서가 어느 정도 정비되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의 천문학에 대해서는, 문헌으로는 『고려사』 · 『고려사절요』와 그 밖에 몇 종의 보조자료가 있을 뿐 유적이나 유물도 거의 없는 형편이다. 『고려사』에는 천문지(天文志) 3권, 역지(曆志) 3권, 오행지(五行志) 3권이 있는데, 중국의 사서 형태를 모방한 것이다.
천문지에는 나라의 길흉이 하늘의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전통적인 사상에 따라 세밀히 관측된 천문기상현상이 기록되어 있으며, 역지는 간단한 서문에 이어서 고려시대에 사용했던 『선명력』과 『수시력(授時曆)』의 모든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오행지는 자연에서 일어난 특별한 현상을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의 오행이라는 자연철학적 입장에서 분류하여 기록한 것으로, 수해 · 화재 등 천문학과는 거리가 먼 현상들이 기록되어 있다.
천문지에 기록된 현상으로는 고려 475년 동안에 일어난 132회의 일식(日食)을 비롯하여 혜성 · 유성 · 운석 · 객성, 금성과 목성의 주현, 달의 오성(5개의 행성), 엄폐, 행성의 특수한 별자리 침범 등의 천문현상과 여러 종류의 햇무리와 여러 색을 띤 대기 속의 광학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천문지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비해 훨씬 수가 많다.
천문역법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관서로는, 신라의 제도를 계승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국초(918)부터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을 두었다. 이들은 천문 · 역수(曆數) · 측후(測候) · 누각의 일을 관장한 관서인데, 태복감은 주로 천문 · 측후, 태사국은 역법 · 누각의 일을 맡았던 것 같다.
태복감에는 감(監) · 소감(少監) · 사관정(四官正, 春夏秋冬) · 승(丞) · 복박사(卜博士) · 복정(卜正)을 두었고, 태사국에는 영(令) · 승 · 영대랑(靈臺郎) · 보장정(保章正) · 설호정(契壺正) · 사신(司辰) · 사력(司曆) · 감후 등을 두었다.
1023년(현종 14)에 이르러 태복감을 사천대(司天臺)로 바꾸었다. 문종대(1046∼1083)에 와서 사천대와 태사국을 정비하여 사천대에는 정3품 판사(判事) 1인, 종3품 감 1인, 종4품 소감 2인, 종5품 춘관정(春官正) · 하관정(夏官正) · 추관정(秋官正) · 동관정(冬官正) 각 1인, 종6품 승 2인, 종7품 주부(注簿) 2인, 종9품 복정 1인, 복박사 1인을 두었다.
태사국에도 판사 1인 지국사(知局事) 1인, 종5품 영 1인, 종7품 승 1인, 정8품 영대랑 2인, 종8품 보장정 1인, 설호정 2인, 정9품 사신 · 사력 2인, 종9품 감후(監候) 2인을 두었다. 다시 1116년(예종 11)에 이르러 사천대를 사천감(司天監)으로 바꾸었다. 1275년(충렬왕 1)에는 사천감을 관후서(觀候署)로 바꾸었다가 뒤에 다시 사천감으로 복구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는 사천감에 태사국을 합쳐서 서운관(書雲觀)이라 하고 원리(圓吏)를 책정하여 정3품 제점(提點) 1인, 정3품 영 1인, 종3품 정(正) 1인, 종4품 부정(副正) 1인, 정5품 승 1인, 종6품 주부 2인, 종7품 장루(掌漏) 2인, 정8품 시일(視日) 3인, 정9품 감후 3인, 종9품 사신 2인을 두었다. 그러나 뒤에 제점을 없애고 영을 판사로 고쳤다.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사천감으로 고치고, 판사 이하를 문종 때의 옛 제도로 고쳤으며, 새로이 종9품의 복조교(卜助敎)를 더하였다. 그리고 태사국을 따로 세우고, 영 이하의 관직을 역시 문종 때의 옛 제도로 복구시켰다. 그러나 1362년에는 다시 둘을 합쳐서 서운관이라 하고 원리도 개정하여 정3품 판사, 종3품 정, 정4품 부정, 종5품 승, 종6품 주부, 종7품 장루, 정8품 시일, 종8품 사력, 정9품 감후, 종9품 사신 등을 두었다.
1369년에는 이 같은 제도를 또다시 나누어서 1356년 때의 제도로 하였다가, 1372년에는 다시 합쳐서 서운관 제도로 바꾸었다. 즉, 공민왕대에만 실로 네 번이나 서운관의 제도를 바꾼 것이다. 말기의 불안이 여기에도 나타나 있다.
고려가 사용한 역법은 우선 태조가 국초에 『선명력』을 그대로 승용(承用)하였다. 이는 당나라 목종(穆宗) 때인 822년(長慶 2)에 서앙 등이 편찬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 초에도 이미 100년 가까이 지난 역법이었으니 잘 맞을 리가 없었다. 1022년(현종 13)에는 송나라에서 『건흥력(乾興曆)』을 도입하였으나 바로 쓰지는 않았다.
중국의 송대는 역법의 쇠퇴가 극에 달했던 시대이고, 전후 열여덟 번이나 개력(改曆)할 정도였다. 이러한 가운데 만들어진 『건흥력』이 『선명력』보다 뚜렷하게 좋은 것은 못 되었다. 그러므로 이를 쓰지 않고 『선명력』을 계속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선명력』은 천상(天象)과 맞지 않는 부분도 생기고, 또 송나라의 역과도 맞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1020년에는 몇 가지 역법에 대한 문제와 논의도 일어났었다.
1052년(문종 6)에는 태사(太史) 김성택(金成澤)이 『십정력(十精曆)』을, 이인현(李仁顯)이 『칠요력(七曜曆)』을, 한위행(韓爲行)이 『경행력 (行曆)』을, 양원호(梁元虎)가 『둔갑력(遁甲曆)』을, 김정(金正)이 『태일력(太一曆)』을 왕명을 받들어서 편찬하였다. 이는 다음해의 재상(災祥)을 물리치고 빌기 위한 것으로 그 역의 명칭에서도 미신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다.
1081년에도 납일(臘日)에 대한 물의가 있었다. 송력(宋曆)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문제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선 지 얼마 뒤에 ≪수시력≫이 편찬되어 이를 사용하게 된 것이 1281년(至元 18)이었다.
이 해가 충렬왕 7년인데, 원나라의 사신 왕통(王通)이 『수시력』을 가지고 와서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준비 없이 곧 이것을 시행할 수는 없었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태사원(太史院)이 역수에 정밀함을 보고 동행했던 최성지(崔誠之)에게 내탕금(內帑金:임금의 사사로운 돈) 100근(斤)을 주어서 스승을 구해서 이를 배우게 하였다. 최성지가 그 역법을 다 배우고 돌아오자 고려는 『수시력』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개방지술(開方之術)을 전하지 못하여 교식(交食:일식 · 월식의 관측)만은 『선명력』의 술법을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자연 교식의 예보가 실제와 맞지 않아서 일관(日官)들이 고생하였으나, 고려 말까지는 곧바로 고치지 못한 채로 내려오고 말았다.
1370년(공민왕 19)에는 원나라의 뒤를 이은 명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사신으로 갔던 성준(成准)이 명제(明帝)로부터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대통력』은 『수시력』과 역원(曆元)과 세실소장법(歲實消長法)만 다를 뿐 그 밖에는 모두 똑같은 것이었으므로, 고려의 역법사용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고려 때의 천문관계 유적은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다만 개성 만월대(滿月臺)에 첨성대라고 구전(口傳)되는 건축물이 있다. 넓이 약 3㎡의 석판(石板)을 높이 3m 가량 되는 5개의 석주(石柱)로 받치고 있고, 대상 네 귀에는 지름 15㎝ 가량의 구멍이 있어서 석난간(石欄干)이 있었던 것 같다. 이 구조는 조선시대의 간의대(簡儀臺)를 연상하게 한다.
이 밖에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에 참성단(塹星壇)의 유적이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 상방하원의 구조라든지 조선시대의 혜성(彗星), 기타 관측지로 사용되었던 사실 등으로 보아 고려의 강도(江都) 40년 동안의 첨성대가 아니었나 짐작할 뿐이다.
조선시대의 천문학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서운관의 정비와 그 직제의 특이성에 있다. 개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고 왕궁이 완성되자, 경복궁 영추문(迎秋門) 안과 북부 광화방(廣化坊)의 두 곳에 서운관을 설치하고 천문 · 지리 · 역수 · 점주(占籌) · 측후 · 각루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서운관은 뒤에 관상감(觀象監)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나 조선 초에 설치했던 관상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거의 완전히 회진(灰盡)되어 버리고 그 일부는 선조 때부터 조금씩 창덕궁 내에 복구되었으며, 숙종 때에 이르러 영감사(領監事) 남구만(南九萬)이 현지를 답사하여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에 다시 옛 관상감을 복구시켰다.
여기에는 청사(廳事) · 관천대(觀天臺) · 흠경각(欽敬閣) · 일구대(日晷臺) · 측우대(測雨臺) · 천문직려(天文直慮) · 삼력청(三曆廳) · 취길청(趣吉廳) · 일과청(日課廳) · 관청(官廳) · 인력소(印曆所) · 인출소(印出所) · 이청(吏廳) · 문랑(門廊)이 있었다. 이 밖에 경희궁의 개양문(開陽門) 밖에도 관상감을 설치하였다.
경복궁 내에 있던 국초의 관상감의 유물들은 고종 때 대원군(大院君)이 경복궁을 재건했을 때 영추문 밖의 매동국민학교(梅洞國民學校)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관상감의 직제로는 고려의 옛 제도를 따라 판사 2인, 정(正) 1인, 부정 2인, 승 2인, 겸승(兼丞) 2인, 주부 2인, 겸주부(兼注簿) 2인, 장루 4인, 시일 4인, 사력 4인, 감후 4인, 사신 4인 등을 두었다.
1425년(세종 7)에 이르러서는 금루(禁漏)를 분리하여 천문(天文) 20인, 금루 40인으로 하였다. 1433년에는 중국 흠천감(欽天監)의 예를 따라 다시 천문에 합속(合屬)시켰다. 뒤에 서운관은 관상감으로 명칭이 바뀌고,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그 직제도 정1품 영사(領事)는 영의정이 겸임하고, 그 밑에 정3품 당하관(堂下官) 정이 1인, 종3품 부정 1인, 종4품 첨정(僉正) 1인, 종5품 판관 2인 등 모두 24인을 두었다.
이것이 뒤에 다시 개정되어 영사 1인은 역시 영의정이 겸직하고, 그 밑에 종2품 이상인 자로 제조(提調) 2인을 겸임하게 하고 다시 그 밖에 정원 없이 당상(堂上)을 두게 하였다. 그 아래는 이전과 같이 정3품 당하관인 관상감 정(正) 등을 두었다. 관상감에 근무한 인원은 생도 60인을 포함하여 모두 200인을 훨씬 넘었다. 이 직제와 인원수는 조선시대에 관상감이 얼마나 존중되었는가를 말해 준다. 특히, 영의정이 그 최고의 책임을 겸직한 예는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일이다.
조선 초기부터 과거(科擧)에는 문과 · 무과 이외에 잡과(雜科)가 있었다. 잡과는 다시 역과(譯科) · 의과(醫科) · 음양과(陰陽科) · 율과(律科)로 나누어졌고, 관상감원은 그 가운데 음양과 출신들로 충당되었다. 하지만 초기에는 사대부 자제들이 잡과에 응시하는 것을 기피한 듯하고, 역상(曆象)에 관한 중요한 직무는 문과 출신들이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엽 이후부터는 잡과 출신들이 중인(中人)이라는 특수한 계급을 형성하여 역(譯) · 의 · 음양 · 율에 관한 일을 반세습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 중인 출신자는 관상감에서 정 이하의 직책을 맡아 그 위에 있는 영사와 제조의 지시를 받았다. 여기서 양반 출신자와 중인 출신자의 협력이 필요했으며, 실질적으로 역법 도입이나 의상(儀象) 제작, 도서 저술 등에서 그들이 협력한 자취가 매우 뚜렷하였다.
음양과의 과시(科試)에는 예조당상(禮曹堂上) 3인과 관상감 제조 1인이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시험과목은 천문학에서는 『보천가(步天歌)』, 외우거나 그리기[誦或圖], 『대명력(大明曆)』의 일월식(日月食),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의 일월식, 오성(五星:木火土金水), 태양력일(太陽曆日), 교식(交食)의 추보가령(推步假令), 사여성(四餘星), 중성(中星)의 추보(推步), 태음(太陰), 『칠정산외편』의 일월식 계산 등이었다.
지리학에서는 청오경(靑烏經) · 금낭경(錦囊經) · 착맥부(捉脈賦) · 지남변망(指南辨妄) · 의룡감룡(疑龍撼龍) · 명산론(明山論) · 곤감가(坤鑑歌), 호순신(胡舜申)의 지리문정(地理門庭) · 장중가(掌中歌) · 지현론(至玄論) · 낙도가(樂道歌) · 입시가(入試歌) · 심룡기(尋龍記), 이순풍의 극택통서(剋擇通書) · 동림조담(洞林照膽)이었다.
명과학(命課學)에서는 원천강(遠天綱) · 삼신통재(三辰通載) · 대정수(大定數) · 범위수(範圍數) · 육임오행정기(六壬五行精記) · 극택통서 · 자미수(紫微數) · 응천가(應天歌), 서자평(徐子平)의 현여(玄輿) · 난대묘선(蘭臺妙選) · 성명총화(星命摠話) 등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약간씩 바뀌어 천문학에서는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에 의한 계산이 『시헌력(時憲曆)』에 의한 계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수리정온(數理精蘊)』과 『역상고성(曆象考成)』이 시험과목이 되었다. 중인 자제로서 이 잡과 가운데 음양과 천문학 시험에 응시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공부를 하였다.
이들은 그 일가친척에게 천문학을 배우고 응시하여 합격하면 관상감원으로 임용되었다. 조선시대 후반기의 관상감에서 이들 중인들이 직업적인 천문가를 형성했던 것은 조선시대 천문학에서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천문관계 기구로서 관상감 기타에 설치한 의상도 조선시대에 와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발달하였다. 우선 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자 경루(更漏)를 종가(鍾街)에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렸고, 권근(權近)의 노력으로 새로이 위치를 보정해서 그린 천문도(天文圖)를 돌에 새겼다. 이 석각 천문도는 현재 창덕궁에 보관되어 있다.
세종대에 와서는 왕의 주도하에 여러 가지 기구가 제작되어 서운관이 크게 정비되었다. 1432년(세종 14)에 정초(鄭招) · 정인지(鄭麟趾)로 하여금 고전을 연구하게 하고, 이천(李蕆) · 장영실(蔣英實)은 공역(工役)을 감독하게 하여 목간의(木簡儀)를 만들어서 한양의 북극출지(北極出地), 즉 위도(緯度)를 측정하였다.
그 뒤 1439년에 이르러 동(銅)을 부어서 만든 대간의(大簡儀) · 소간의(小簡儀) · 혼의(渾儀) · 혼상(渾象) · 현주일구(顯珠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 앙부일구(仰釜日晷)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자격루(自擊漏)를 완성하였다. 간의(簡儀)와 앙부일구는 원나라 곽수경(郭守敬)의 법을 따랐고, 혼의 · 혼상은 원나라 오징(誤澄)의 책을 따랐다.
이들 의상이 완성되자 호조판서 안순(安純)을 시켜서 경회루 북쪽에 높이 31척, 길이 47척, 너비 32척의 석대(石臺)를 쌓게 하여 그 위에 간의를 안치하고 그 간의 남쪽에는 정방안(正方案)을 설치하였으며, 석대 서쪽에는 40척 높이의 동표(銅表)를 세우고 그 아래에 청석(靑石)으로 규(圭)를 만들어 경부(景符)를 써서 정오(正午)의 해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동표 서쪽에 소각(小閣)을 지어서 혼의와 혼상을 안치하였다.
소간의는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설치하고, 하나는 서운관으로 보냈다. 앙부일구는 그 속에 시신(時神)의 그림을 그려서 아무나 보아도 곧 시각을 알게 만들어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가에 놓고, 하나는 종묘(宗廟) 남쪽 거리에 놓았다.
일성정시의는 모두 네 개를 만들어 하나는 만춘전(萬春殿) 동쪽에 놓고, 하나는 서운관에 보냈으며, 둘은 동서 양계(東西兩界)의 원수영(元帥營)에 보냈다.
자격루는 물의 힘으로 자동적으로 운행하면서 시각을 알리는 장치로, 이를 경회루 남쪽에 지은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하여 작동하도록 하였다. 또, 이와는 별도로 흠경각을 천추전 서쪽에 짓고 그 속에 천지(天地)의 운행을 보여주는 기계장치를 하여 수력으로 돌게 만들었다. 이 보루각과 흠경각의 장치는 매우 정교한 것으로 세종대 기계기술의 정화라고 할 만하다. 이 밖에도 좀더 간편한 소정시의(小定時儀)와 행루(行漏)도 제작, 사용하였다.
1433년에는 또다시 천문도를 돌에 새겼다고 하는데, 현존하지 않는다. 1442년에는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하였는데, 이 우량 측정도 서운관원 업무의 하나였다. 1466년(세조 12)에는 왕 자신이 규형(窺衡), 즉 각도와 축적의 원리를 이용해서 원근과 고저를 측량하던 장치인 인지의(印地儀)를 만들었다. 모두 측량에 필요한 기구이다.
1491년(성종 22)에는 천체관측으로 누각에 의한 보시(報時)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규표(圭表) 세 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내전(內殿)으로 들이고, 하나는 정원(政院), 하나는 홍문관에 설치하였다.
1494년에는 영사 이극배(李克培), 이조참판 안침(安琛), 도승지 김응기(金應箕), 홍문관 교리 최부(崔簿) 등을 시켜 설계하고, 부정(副正) 이지영(李枝榮)과 천문학 습독관(習讀官) 임만근(林萬根)에게 감독하게 하여 소간의를 제작하였다.
1526년(중종 20)에 사성(司成) 이순(李純)이 중국의 『혁상신서(革象新書)』를 참고하여 목륜(目輪)을 제작해서 관상감에 설치하였고, 이 해에 세종대에 만든 여러 의상이 모두 낡았기 때문에 이들을 중수하는 한편, 부건(副件:여벌)을 만들어서 관상감에 설치하였다. 1535년에는 누각을 주조하였는데, 이는 현재도 덕수궁에 진열되어 있다.
1546년(명종 1)에는 관상감을 시켜 간의대와 규표를 중수하게 하였고, 이때 하세순(河世純)이 양쪽 대궐의 보루 · 일영(日影) 등의 기구와 관천의상(觀天儀象)을 수리하였다.
1548년에는 관상감에 명하여 혼천의(渾天儀)를 만들게 하여 홍문관에 설치하였고, 1550년에는 종묘 동구에 있는 앙부일구를 개수하게 하였으며, 또 관상감 제조 상진(尙震)과 김익수(金益壽)를 시켜 흠경각의 경운(耕耘:논밭을 갈고 김을 매는 것), 예확(刈穫)의 제도를 고치게 하였다.
이 밖에도 기록에 누락된 의상이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들은 임진 · 정유의 왜란으로 거의 다 소실되고 말았다. 왜란이 끝나자 1601년(선조 34)에는 영감사(領監事) 이항복(李恒福)에게 명하여 의상을 중수하게 하였다. 이항복은 간의(簡儀)의 방부(方趺)를 얻어 노공(老工) 2인과 더불어 옛 제도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우선 만들기 어려운 누기(漏器) · 간의 · 혼상부터 복구하고, 그 밖의 규표 · 혼의 · 앙부일구 · 일성정시의 등의 기구는 미처 만들지 못하였다고 한다.
1614년(광해군 6)에는 흠경각 · 보루각을 창덕궁 서린문(瑞麟門) 안에 세웠으나 흠경각은 효종 때 헐고 그 자리에 만수전(萬壽殿)을 지었다. 1657년(효종 8)에는 혼천의를 만들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강관(講官) 홍처윤(洪處尹)이 혼천의를 만들었으나 도(度)가 맞지 않는 곳이 많아서 이번에는 김제군수 최유지(崔攸之)를 시켜서 만들게 하였는데, 이것은 물의 힘으로 스스로 돌아가게 한 것이었다.
1664년(현종 5)에는 효종 때 최유지가 만든 혼천의가 고칠 곳이 있다 하여 송이영(宋以頴) · 이민철(李敏哲)을 시켜서 측후하는 기계를 개조하게 한 다음 이를 궁중에 놓았다.
1669년에는 좨주(祭酒:성균관의 종3품 벼슬) 송준길(宋浚吉)의 청에 따라 이민철에게 『채씨순전(蔡氏舜典)』에 의하여 혼천의를 만들게 하였다. 이는 수격지법(水激之法), 즉 수력으로 운전하는 혼천의였다. 이에 대하여 송이영이 만든 혼천의는 서양 자명종(自鳴鐘)식의 아륜호격지제(牙輪互激之制), 즉 톱니바퀴를 써서 자동으로 가게 하는 것이었다. 즉, 송이영은 북경을 통하여 전래된 서양의 시계기술을 혼천의 제작에 적용하여 수력이 아닌 추(錘)에 의한 자동 혼천의를 만들었던 것이다.
1687년(숙종 13)에는 이민철에게 명하여 현종 때의 혼천의를 중수하여 새로 지은 제정각(齊政閣)에 안치하게 하였다. 1704년에도 감관(監官) 안중태(安重泰)와 이시화(李時華)가 부건(副件:여벌) 혼천의를 만들었다. 또 숙종 때는 국초에 만든 석각 천문도가 마련되었기에 새로이 천문도를 돌에 새겼다. 1723년(경종 3)에는 서양의 것을 모방하여 문신종(問辰鐘)을 제작하였다.
1732년(영조 8)에는 숙종 때 만든 부건 혼천의가 오래되어 차이가 나므로 안중태 등을 시켜 중수하게 하여 규정각(揆政閣)을 지어서 그 속에 안치하였다. 1770년에는 국초의 석각 천문도가 경복궁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거두어서 관상감으로 옮겨 숙종 때 새로 만든 석각 천문도와 나란히 흠경각 속에 보관하게 하였다.
또한 영조 때는 1708년(숙종 34)에 관상감에서 올린 샬(Shall,A., 湯若望)의 「적도남북총성도(赤道南北總星圖)」를 본떠서 새로이 이와 같은 총성도를 만들었는데, 이는 현재 법주사(法住寺)에 보관되어 있다.
1777년(정조 1)에 제조 서호수(徐浩修)가 관장하고 감관 이덕성(李德星) 등이 함께 규정각의 혼천의를 중수했으며, 1789년에는 감관 김영(金泳) 등이 적도경위의(赤道經緯儀)와 지평일구(地平日晷)를 주조하여 올리고 부건은 관상감에 설치하였다.
이상이 조선시대에 제작된 의상의 대체적인 기록이다. 그러니 기록에서 빠진 기구가 많은 것도 틀림없다. 국가에서 제작한 것 이외에 개인이 제작한 것으로도 홍대용(洪大容)의 농수각(籠水閣)에 설치했던 통천의(統天儀) · 혼상의(渾象儀) · 측관의(測管儀) · 구고의(勾股儀) 등이 있었다.
또 철종 때의 남병철(南秉哲)이 저술한 『의기집설(儀器輯說)』에는 혼천의 이외에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 · 간평의(簡平儀) · 험시의(驗時儀) · 적도고일구의(赤道高日晷儀) · 혼평의(渾平儀) · 지구의(地球儀) · 구진천추합의(句陳天樞合儀) · 양경규일의(兩景揆日儀) · 양도의(量度儀)에 대한 해설이 실려 있다.
이로 보아 이러한 의기(儀器)도 조선시대 말엽에 이를 때까지는 계속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도 개인이 소장 또는 휴대했던 각종 일구의 종류도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여러 관측에 관한 기록은 과학적인 것과 점성적인 것이 서로 섞여서 조선왕조실록과 『증보문헌비고』 등에 실려 있다.
관측한 대상은 일식 · 월엄범오위(月掩犯五緯:달이 行星을 가리는 현상) · 오위엄범(五緯掩犯:행성끼리 접근하는 현상) · 오위합취(五緯合聚:여러 개의 행성이 한데 모이는 현상) · 오위엄범항성(五緯掩犯恒星:행성이 항성에 접근하는 현상) · 성주현(星晝見:금성이나 목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 · 객성(客星) · 혜패(彗孛:혜성의 출현) · 천변(天變:하늘에서 큰소리가 나는 현상과 같은 것) · 일월변(日月變:흑점이나 해와 달의 빛에 이상이 생기는 현상) · 운적(暈適:白虹貫日과 같은 해와 달의 무리가 나타나는 현상) · 성변(星變:별이나 행성이 흔들리거나 모이거나 하는 현상) · 유운(流隕:유성이 떨어지는 현상) · 운기(雲氣:하늘의 갖가지 색의 빛이 나타나는 현상)에서부터 물이(物異)라고 하여 여러 가지 기상 이변이나 지진과 생물학적인 이변 같은 현상이 있어서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기상현상과 천문현상 사이의 뚜렷한 구분이 없었던 것은 동서가 마찬가지였다. 다만 조선시대 말엽까지도 확실한 구분 없이 내려왔던 것은 그만큼 천문학의 현대화가 늦었던 까닭이다.
이러한 현상의 관측, 관찰 중에서도 백홍관일(白虹貫日) · 백홍관원(白虹貫圓) · 지진 · 지동(地動) · 객성 · 혜성 · 패성(孛星:혜성의 일종) · 치우기(○尤旗:혜성의 꼬리가 깃발과 같이 흰 것) · 영두성(營頭星:낮에 별이 떨어지는 것) 등은 관측되는 즉시 관상감 상번자(上番者)가 승정원 · 시강원에 가서 구두로 보고하고, 밤이면 소단자(小單子)를 만들어서 문틈으로 넣었다.
또, 중번(中番) · 하번(下番)은 각기 삼상(三相)과 양제조(兩提調)에 사람을 시켜서 보고하였다. 이 단자를 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라고 하였다.
그 밖의 일월식 · 일월색적(日月色赤) · 일월운(日月暈) · 이(珥) · 관(冠) · 배(背) · 포(抱) · 경(瓊) · 극(戟) · 이(履) · 일중흑자(日中黑子) · 월오성범식입(月五星犯食入) · 태백주현(太白晝見) · 유성비성(流星飛星) · 운기(雲氣) · 화광(火光) · 홍(虹) · 뇌동(雷動) · 전광(電光) · 박(雹) · 무(霧) · 상(霜) · 설(雪) · 우(雨) · 토우(土雨) 등의 현상도 서식에 따라 계(啓:임금에게 제출하던 문서의 하나)하고, 또 『풍운기(風雲紀)』에 기록하여 올렸다. 이 보고의 내용과 형식으로도 천문과 기상에 관한 구별이 없었다는 사실과, 또 어떤 미신적인 요소를 볼 수 있다.
조선에서 사용한 역은 국초에는 고려 말과 같이 『수시력』 · 『대통력』과 일부는 『선명력』을 썼으나, 세종 때에 이르러서 『수시력』과 『대통력』의 완전 소화와 사용을 서둘렀다.
1433년(세종 15)에 정초 · 정흠지(鄭欽之) · 정인지를 시켜서 명나라의 원통(元統)이 편찬한 『대통력통궤(大統曆通軌)』를 연구하고 교정하여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실무는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이 담당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규장각(奎章閣)의 『칠정산내편』이 이순지 · 김담이 명을 받아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 저자들은 또 별도로 『대통력일통궤(大統曆日通軌)』 · 『태양통궤(太陽通軌)』 · 『태음통궤(太陰通軌)』 · 『교식통궤(交食通軌)』 · 『오성통궤(五星通軌)』 · 『사여전도통궤(四餘纏度通軌)』 등 『대통력일통궤』의 각론(各論)에 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뿐만 아니라 『칠정산내편』 정묘년교식가령(丁卯年交食假令)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칠정산내편』은 명나라와의 정치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역원은 『대통력』의 홍무(洪武) 17년(1384)을 따르지 않고 원나라의 지원(至元) 17년(1280)으로 하였으며, 『대통력』에서 말소했던 세실(歲實)의 소장지법(消長之法)을 복구, 채택하고 있다.
1393년에 명나라의 이덕방(李德芳)이 『대통력법』에서 세실소장지법을 폐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창한 일이 있었다. 우리 학자들이 이 주장을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자신들이 그것을 옳다고 판단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매우 현명하게 이 세실소장지법을 복구하였다.
그뿐 아니라 『칠정산내편』 3권의 체재도 『수시력』과 『대통력』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려서 매우 정돈되고 체계적으로 편찬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칠정산내편』은 『수시력』과 『대통력』을 완전히 소화하여 재정비한 자주적인 솜씨가 뚜렷한 역으로 그만큼 높이 평가될 만하다.
원나라는 서방에서 아랍의 역을 도입하여 보조력(補助曆)으로 사용하였고, 명나라도 이를 한어(漢語)로 번역, 간행하여 사용한 『회회력(回回曆)』이 있었다. 세종은 이 『회회력』도 이순지와 김담을 시켜 우리 나라에 맞도록 교정해서 『칠정산외편』 5권을 편찬하게 하였다.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은 모든 수치가 한양을 기준해서 계산한 값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 나라에서 쓰는 데 편리하였다. 이후에는 이 『칠정산내편』으로 역 계산을 하였고, 『칠정산외편』으로도 교식, 기타를 계산하여 보조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중수대명력(重修大明曆)』 · 『경오원력(庚午元曆)』도 이순지 · 김담을 시켜 교정, 편찬하게 한 것으로 보아 이들 역법 역시 제3의 보조역으로 교식 등의 추보에 사용하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 중국에서는 명말(明末)에 서양인 신부(神父) 이마두(利瑪竇)가 와서 서양의 천문학을 전하자, 서광계(徐光啓)가 주가 되어 이지조(李之藻) 등의 협력으로 『숭정역서(崇禎曆書)』를 편찬하였으나, 명나라는 시행을 보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청나라가 들어서자 1644년(順治 元年)에 샬이 『숭정역서』를 재정리한 『신법서양역서(新法西洋曆書)』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다음해부터 실시하였다. 이것이 곧 『시헌력(時憲曆)』이다. 즉, 1644년(인조 22)에 관상감 제조 김육(金堉)이 이것의 도입 · 시행을 건의하였고, 다음해에는 세자가 청나라의 인질에서 풀려 나오면서 샬로부터 기증받은 천문역법에 관한 서적을 가지고 돌아왔다.
1646년에는 김육이 연경(燕京)에 가는 길에 김상범(金尙范) 등 역관(曆官) 2인을 대동하여 시헌력법을 배우게 하고자 하였으나, 흠천감의 문금(門禁)이 심하여 샬을 만나지 못한 채 역서만 얻어서 돌아왔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도 다시 김상범을 연경에 보내 역법을 배워 오게 해서 1653년부터는 조선에서도 『시헌력』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성법(五星法)에 관한 입성(立成:수치표)을 얻지 못하여 오성의 계산은 그대로 칠정산법을 따랐다. 그래서 1655년에 다시 김상범을 연경에 보냈으나 도중에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얼마 동안 청나라에서 시헌력법에 대한 반대론이 일어 이를 잠시 폐지한 일이 있었다가 다시 복구하였다(1665∼1669). 이 동안에는 『시헌력』 도입도 일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705년(숙종 31)에 관상감원 허원(許遠)을 연경으로 보내어 『시헌력』 칠정표(七政表)를 구해 가지고 와서, 이후 3년에 걸쳐 이를 연구하여 1708년부터는 역 계산을 모두 시헌력법에 의하게 되었다. 김육의 『시헌력』시행 건의로부터 실로 60여 년이 걸려서 거의 완전히 소화, 실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도 연근법(年根法)에 대한 미심점 등이 남아서 서신을 통하여 흠천감원에게 질문한 일도 있었고, 허원을 다시 북경까지 보낸 일도 있었다.
그 후 중국인 하국종(河國琮) · 매각성(梅殼成) 등이 『신법서양역서』의 단점을 보완, 정비하여 1721년에 『역상고성』 상 · 하편을 완성시켰다. 이는 역원을 1684년(강희 23)으로 잡은 것인데, 그 뒤 옹정(雍正) 초에 서양인 쾨글러(Kögler,I., 戴進賢) · 페레이라(Pereira,A., 徐懋德)가 일전월리표(日纏月離表)를 교정 · 수리 · 해설하여 보완하였다.
조선에서는 먼저의 시헌력법, 즉 탕법(湯法)을 버리고 이 『역상고성』 상 · 하편 법인 매법(梅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매법은 탕법과 크게 차이나는 것이 아니었으나 계산에서 24기(氣) 합삭현망(合朔絃望)이 실제와 맞지 않아서 관상감원을 여러 차례에 걸쳐 연경까지 파견하였다.
『역상고성』을 도입할 때는 『역상고성』과 같이 3부작 율력연원(律曆淵源)을 이루는 『수리정온』 · 『율려정의(律呂正義)』도 도입, 연구되었다. 역관 안국린(安國麟) · 변중화(卞重和)가 연경에서 이것들을 구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수리정온』은 역법을 위한 수학을 총망라한 책으로 시헌력법에 의한 추보(推步)에 기초가 되었다.
그 뒤 중국에서는 1742년에 흠천감 정(正) 및 부정(副正)이었던 서양인 쾨글러 · 페레이라가 카시니(Cassini,G.D., 喝西尼)의 관측치와 케플러(Kepler,J., 刻白爾)의 행성운동법칙을 도입하여 『역상고성』 후편을 편찬하였다. 이는 타원궤도(楕圓軌道)를 도입한 것으로, 이 점에서 매법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또 이 대법(戴法) 또는 갈법(噶法)을 도입, 시행해야 하였다. 연경에 간 역관 안명열(安命說) · 김정호(金挺豪) · 이기흥(李箕興)과 황력재자관(皇曆賷咨官) 김태서(金泰瑞, 또는 兌瑞)가 이들을 사들였다. 관상감원은 이 대법 연구에 몰두하여 1744년(영조 20)에는 그 시행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일전(日纏)과 월리(月離)와 교식(交食)만 대법에 따르고 오성은 여전히 매법에 따랐다. 이 매법이 완전히 소화되어 실시된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정조 초까지는 이것이 이루어져서 1782년(정조 6)에는 시헌법에 의한 『천세력』도 간행을 보게 되었다.
조선 말에 서양 문물이 일본을 통하거나, 또는 직접 구미로부터 흘러 들어오자, 1905년에 이르러 드디어 이전의 중국식 음양력을 버리고 만국 공용의 서양식 태양력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헌력≫도 참용(參用)하기로 한 것이며, 민간에서는 그 뒤에도 오랫동안 음력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역법의 기초가 되는 한양의 위도와 경도, 즉 북극고도(北極高度)와 연경을 기준으로 한 동서편도(東西偏度)를 결정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 때 역관 윤사웅(尹士雄) · 최천구(崔天衢) · 이무림(李茂林) 등을 각각 강화의 마니산, 갑산(甲山)의 백두산, 제주의 한라산에 보내어 그곳의 북극고도를 측정하게 하였다. 이 값을 『관상감일기(觀象監日記)』에 기재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1713년(숙종 39)에 청나라의 목극등(穆克登)이 사력(司曆) 5인을 거느리고 와서 백두산 국경문제를 정했을 때, 하국주(河國柱)가 상한대의(象限大儀)를 가지고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하여 37°39′15″를 얻었고, 이 값은 『역상고성』에 기재되었다.
고려 때에는 원나라에서 고려(개성일 것임)의 북극고도를 측정한 값이 38도 1 · 4로 『수시력』에 기재되었다. 이 값은 원주를 365°25′으로 한 도수이므로 현행법(역상고성법)으로 고치면 37°41′여가 되어 앞의 한양 북극고도와 비슷하다.
1791년(정조 15)에는 한양의 북극고도의 값을 기준으로 하고, 팔도여도(八道輿圖)를 이용하여 8도의 관찰(觀察) 소재지의 위도를 결정하였다. 그 값은 관북(關北, 咸興) 40°57′, 관서(關西, 平壤) 39°33′, 해서(海西, 海州) 38°18′, 관동(關東, 原州) 37°6′, 호서(湖西, 公州) 36°6′, 영남(嶺南, 大邱) 35°21′, 호남(湖南, 全州) 35°15′을 얻었다. 한양의 동서편도는 연경의 동쪽 10°31′으로 결정되었다.
이 값은 『역상고성』에 기재된 값이다. 이는 남회인(南懷仁)이 만든 「곤여도(坤輿圖)」와 일치되는 값이다. 1791년에 역시 팔도여도로 각 관찰영의 한양을 기준으로 한 동서편도를 결정하였고, 그 값은 관북 편동(偏東) 1°, 관서 편서 1°15′, 해서 편서 1°24′, 관동 편동 1°3′, 호서 편서 9′, 영남 편동 1°39′, 호남 편서 9′이다.
혼(昏)과 신(晨), 즉 저녁과 새벽의 정확한 시각을 알기 위해서는 계절에 따라 특정 별의 중성(中星)의 자오선(子午線)을 통과하는 때가 기준이 된다. 그러나 세차(歲差) 때문에 별이 1년에 51초씩 동행하여 별의 위치는 예와 지금이 맞지 않는다.
태조 때는 기도구본천문도(箕都舊本天文圖)를 얻었으나 실제와 맞지 않아서 1395년(태조 4) 서운관으로 하여금 다시 계산하도록 하여 각 계절 중간에서의 혼효(昏曉)의 중성을 결정해서 『신법중성기(新法中星記)』를 편찬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영감사 김익(金熤)이 경루(更漏)를 바로잡기 위해 중성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여 김영을 시켜 적도경위의와 지평일구를 각각 2좌(座) 제작하여 관측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신법중성기』와 『누주통의(漏籌通義)』 각 1권씩을 편찬하게 하였다. 적도경위의 제작에는 역관 이덕성 등이 참여하였고, 『신법중성기』에는 김종수(金鍾秀)가 서문을 썼다.
이 『신법중성기』는 1783년(정조 7)을 기준으로 한 항성의 위치를 가지고 계산한 것이다. 이 중성표에서는 1395년(홍무 28)의 항성 위치를 기준으로 한 서운관사(書雲觀事) 유방택(柳方澤)의 계산을 참고로 제시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천문학을 연구하거나 실무에 종사한 천문학자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갈라진다. 하나는 중인인 직업 천문학자이며, 다른 하나는 양반 출신의 천문학자이다. 후자는 다시 관상감 제조 또는 영사의 고급 관원이었던 사람과, 재야(在野)에서 연구한 학자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 초에는 대개 문과에 합격한 사람들이 각자의 의사에 따르거나 왕명에 따라 천문 · 역산(曆算)을 공부하고 연구하여 천문 · 역법 · 의상의 발달에 공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권근 · 정초 · 정흠지 · 정인지 · 이순지 · 김담 · 이천 · 김돈(金墩) 등이 모두 그러한 사람이었다.
특히, 이순지와 김담은 국초에 최대의 천문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비롯하여 그것을 편찬하는 데 필요한 『대통력』의 여러 통궤(通軌)와 그 밖의 몇 가지 역법에 관한 공동 저술을 남겼고, 이순지는 다시 왕명을 받들어 중국 역대의 역상에 관한 저술을 정리, 편찬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4권과 항성과 별자리에 관한 『천문유초(天文類抄)』도 저술하여 천문서적 출판에서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 중 『천문유초』는 음양과 과거에서 『보천가』를 대신하여 교과서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그 뒤 역대 영의정으로 관상감의 영사를 겸한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천문 · 역법 · 의상에 관한 지식이 높아서 크든 작든 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관상감 제조를 겸했던 사람들은 모두 천문 · 역상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극배 · 이항복 · 김육 · 이이명(李頤命) · 남구만 · 김응기 · 상진 · 김익수 · 서호수 · 남병철 · 남병길(南秉吉) 등이 그러한 사람으로서 이름을 전한다.
김육은 효종 때 『시헌력』을 도입하는 데 주도적인 구실을 하였고, 서호수는 정조 때 『신법중성기』 · 『서운관지(書雲觀志)』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등의 출간과 제반 의상 제작을 주도하였으며, 남병철 · 남병길 형제는 철종 때 제조를 맡아서 활약하였고, 『의기집설』 · 『시헌기요(時憲記要)』 · 『성경(星鏡)』 등 10여 종의 저술을 남겨 조선 말기의 천문학에 마지막 불을 밝혔다.
이들 고급 문관의 천문학에서의 업적을 도운 것은 관상감에서 천문 · 역법 · 측후 등의 실무를 담당하던 사람들로, 과거의 잡과 중 음양과를 통과한 사람들이었다. 김육이 『시헌력』을 도입할 때 그 계산법을 연구했던 역관 김상범 · 허원 등이 그러한 사람이었다.
정조 때 서호수의 주도하에서 『서운관지』 · 『국조역상고』 · 『신법중성기』 · 『누주통의』 등을 저술, 편찬한 성주덕(成周德) · 김영은 이들 저술을 통하여 불멸의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적도경위의 · 지평일구 등을 제작하는 데도 힘썼다. 이에 앞서 수격법(水激法) · 아륜호격법(牙輪互激法)에 의한 혼천의를 제작한 이민철 · 송이영도 이러한 사람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조선 말에 관상감원 이상혁(李尙爀) · 이준양(李俊養)도 남병길과의 공저와 단독으로 역법에 필요한 수학서(數學書)를 남기고 있다.
관에 나가서 그 직무와 관련하여 천문 · 역산에 대한 일에 관여한 이들 학자들과는 별도로 야(野)에 있으면서, 또는 말직에 있으면서 천문학을 연구한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학자가 나온 이유는 조선에 들어와서 성해진 성리학 자체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존중하고, 또 음양오행류의 자연철학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
특히, 장재(張載)의 학문에 기울었던 서경덕(徐敬德)이나 그러한 경향을 띠었던 정렴(鄭Ꜿ) 같은 사람이 한층 더 천문학적인 지식에 접근하였고, 이황(李滉)도 도산서원(陶山書院)에 혼상(渾象)으로 보이는 유물을 남기고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 실학이 성해지자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백과전서적(百科全書的)인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에 상당한 양의 새로운 천문지식에 관한 것이 기재되어 있고, 김석문(金錫文) · 신경준(申景濬) · 신후담(愼後聃) · 위백규(魏伯圭) · 황윤석(黃胤錫) · 홍대용 · 박지원(朴趾源) · 유희(柳僖) 등이 모두 그 저서에서 천문 · 역산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천문학을 연구하여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재야의 학자 가운데서 일어났던 지전설(地轉說), 지구자전에 대한 주장은 조선시대 천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지전설은 김석문의 『역학도해(易學圖解)』에 처음으로 나타나 일반에서는 이른바 삼대환공부설(三大丸空浮說)로 전파되었다. 김석문은 서양인 로(Rho,J., 羅雅谷)의 저서 『오위역지(五緯曆指)』를 읽었고, 그 속에 지구자전설이 있으나 전혀 틀린 이야기라는 내용을 접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석문은 관측에서 얻은, 지구에서 먼 천체일수록 지구에 대한 회전이 느리다는 사실에서 지구의 표면도 그 중심 둘레를 가장 빠른 속도로 돈다고 결론지었다.
이 지전론은 홍대용의 『담헌서(湛軒書)』 가운데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 보다 과학적인 형태로 설명되어 있고, 박지원은 이 설을 연경의 중국학자에게 선전하였다.
김석문이 『오위역지』에서 지구자전에 대한 암시를 받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자전론을 유도한 논리는 『오위역지』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지구자전의 가능성은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나와 있고, 홍대용은 보다 넓은 우주관과 더불어 이를 기록하고 있다.
조선 말년 서양 문명이 들어오자 각지에 학교가 설립되고 새로운 지식으로 엮은 교과서가 사용되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일이다. 이 중 일본의 것을 번역한 『지문학(地文學)』이라는 교과서가 있었고, 이 속에 천문학에 관한 초보적인 지식이 기술되어 있었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 나라 사람이 현대적인 서양 천문학을 접촉하게 된 것이다.
1908년에는 정영택(鄭永澤)이 서양 천문학서를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이것을 평양의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에서 교과서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그 마지막 시기에 현대적 천문학을 접할 수 있었으나 곧 일본의 침략으로 모든 것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300명 가까운 인원으로 구성되었던 관상감도 해체되고, 일본은 조그마한 조선총독부 관측소를 세우고 말았다.
광복 후 관상대장에 재직했던 이원철(李源喆)이 1932년에 발표한 「독수리자리 에타(○)별의 대기운동」이라는 논문으로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우리 나라 최초로 천문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고, 1958년에는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천문기상학과가 설립되면서 천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 뒤 1967년 연세대학교 이공대학에도 같은 명칭의 학과가 설치되어 서울대학교와 함께 천문학 교육의 양대 기관으로 유지되어 왔으며,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여러 대학에서 천문학 관련 학과를 개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순수 연구기관으로는 1974년 9월에 국립천문대가 대통령령으로 발족하고, 1978년 9월에 61㎝ 반사망원경이 소백산천체관측소에 설치되어 실질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86년에는 국립천문대가 우주전파관측소(14m 전파망원경 설립) 안에 흡수되어 대전 대덕연구단지로 이전한 뒤 1991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부설 천문대로 직제가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천문대가 보유하고 있는 주요 연구시설로는 소백산의 61㎝ 반사망원경과 대덕전파천문대의 14m 전파망원경 외에 보현산천문대의 1.8m 반사망원경 및 태양플레어 망원경이 있다.
한편, 천문학 연구의 발전과 보급을 위해 1965년 3월에는 한국천문학회가 창설되어 매년 2회의 정기 학술발표대회를 열고, 수시로 국제적인 학술대회와 각종 심포지엄을 개최해 오고 있다. 특히 1996년과 1997년에는 제7차 국제천문연맹 아시아-태평양 지역 학술대회와 세종대왕 탄신 6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세종시대의 천문학’)를 개최하였다.
또한 전국 40여 개 대학과 연구소에 소속된 500명 이상의 연구자들이 매년 발간되는 『천문학회지』 · 『천문학회보』 · 『천문학논총』 등의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여 국제과학연맹 논문초록위원회에서 매년 출판하는 『국제천문학 및 천체물리논문초록』에 게재할 뿐만 아니라 국내외 여러 도서관에 배포하여 국제천문학 교류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1973년 9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열린 국제천문학연합회(IAU) 총회에서 가입이 승인되어 회원국가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우주론 · 우리은하 · 외부은하 · 성간물질 · 식련성(食連星) · 태양물리 · 구상성단 · 전파천문학 · 인공위성운동 등 각 분야에서 연구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