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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개념
사물이나 대상에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정은 사물이나 대상에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이다. 한국에서 정은 유학의 성정론에서 다룬 정의 범위를 훨씬 초월하여 인간 본성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인간 내면의 속성이면서 인간 행위의 양태이기도 하다. 또한 인간 의식의 내용이 됨으로써 인간관계의 매듭을 엮는 기능을 다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사정·물정 등의 표현에서 보듯 인간 환경 및 그 속의 사물들, 자연과 자연사물들과도 관련이 된다. 따라서 그 쓰임새도 다양하여 인간의 본성·수양·인품·관계 등에 걸쳐 쓰이는 사회윤리적인 것이면서, 자연을 대상으로 삼은 시적 체험에까지도 쓰이는 심미적인 것이기도 하다.

정의
사물이나 대상에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내용

한국에서 정은 인간 본성의 하나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속성이면서도 인간 행위의 양태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인간 의식의 내용이 됨으로써 인간관계의 매듭을 엮은 기능을 다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이 인간 존재론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론 안에 국한되어 있지는 않다.

인정 · 세정은 그런 테두리 안에 있지만, 사정(事情) · 물정(物情)에서는 정이 인간 환경 및 그 속의 사물들 그리고 자연과 자연사물 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로서는 감정과 거의 동의어일 수 있는 정은 인간 본성과 관련된 사회윤리적인 것이면서도 아울러 심미(審美)적인 것이기도 해서 서정(抒情)과 거의 동의어일 수도 있다.

따라서, 정의 쓰임새가 다양할 것은 쉽게 예상될 수 있다. 인간본성 · 수양 · 인품 · 인간관계 등에 걸쳐 쓰이면서, 자연을 대상으로 삼은 시적(詩的) 체험에까지도 쓰이고 있다.

한국의 유학이 중국 유학의 부분적 영향 아래서 성정론의 테두리에 들 정을 문제삼아왔는가 하면, 한국인의 일상 생활은 천변만화하는 의미에 걸쳐 정이란 낱말을 사용해왔다. 일상 생활언어로서 정은 유학이 개념을 제시하고 범주화한 정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를 일방적으로 답습하거나 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학의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그들 일상 생활 속에서 정을 따로 가꾸고 의식하고 또 기술(記述)해 왔다.

낱말 자체는 중국 한자에서 수용한 것이지만, 그 외연이며 내포는 한국인의 인간론적 · 사회적 그리고 생태적인 개성까지를 반영해온 것이다.

유학에서의 정

한국의 유학에서 정은 인심(人心)론 내지 인성(人性)론의 테두리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에서 그리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심통성정도설(心統性情圖說)」에서 각기 정을 다루고 있는 이외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심(心)과 의(意)들이 서로 물고 있는 연관의 고리 속에서 정을 말하고 있음은 바로 이 때문이다.

더러는 이른바 이기(理氣)와 연관지어져서 정이 논란되고 있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심 · 이 · 기 · 의 · 성과 더불어서 정이 논란될 때, 인간의 정신 내지 심성이 다양하고도 복합적인 구조체로 포착되어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그 여섯 가지를 그 중 어느 단일체를 중심 내지 정상으로 삼고 이룩되는 다면적인 그러면서 통일적인 유기조직으로 보느냐 아니면 상호 연쇄적인 계열체로 보느냐 하는 차이가 지적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여섯 가지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순환체를 이루고 있다고 바꾸어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어느 경우에나 정이 다면체인 인간심성의 중요 인자로 간주되고 있음을 공통으로 지적되어도 좋다.

어느 경우에나 정을 빼고 사람됨을 논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정은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요소로 간주되어 있기에 당연히 심리학적인 영역만이 아니고 도덕론 및 인품론 그리고 인간행위론의 범주에까지 걸쳐서 문제될 성질의 것임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이 고찰하건대,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과 기(氣)를 합하여 한 몸에서 주재가 되는 것을 심(心)이라 하니, 심이 사물에 응해서 밖으로 발하는 것을 정(情)이라 하는 것이다.

성은 심의 체(體)이고 정은 심의 용(用)인데, 심은 아직 발하지 않은 것과 이미 발한 것의 총칭이므로, 심이 성과 정을 통관(統管)한다고 한다.

성에는 다섯 조목이 있는데, 인 · 의 · 예 · 지 · 신이며, 정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데, 희 · 노 · 애 · 구 · 애 · 오 · 욕(喜怒哀懼愛惡欲)이다.”(李珥의 人心道心圖說) 여기서 정은 ‘심이 사물에 응해서 밖으로 발하는 것’ 또는 ‘심의 용’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우암은 ‘무릇 정은 비록 성에서 발하나(盖情雖發於性)’라고 함으로써 율곡과는 다른 견해를 보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또한 마음이 느끼는 바 이것이 곧 정이로다”(且心之感者 卽是情也)라고 하면서 정의 발하는 곳을 성 아닌 마음에다 두고 있다. 한편 퇴계는 “성이 발현하는 것이 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 정의 가운데서 “심이 사물에 응해서 밖으로 발하는 정”은 “외부작용의 수용 자세”라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의해 정의된 파토스(Pathos : 정념 · 격정처럼 일시적이고 지속성이 없는 상태), 곧 감정(Affekt)에 대한 상당한 근사치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정과 파토스의 개념 사이의 제한된 범주 안에서의 비교가 가능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 경우 파토스가 인간성의 열 가지 범주 중의 하나란 것 역시 정이 심 · 기 · 의 · 성 등과 더불어 논란되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에 족하다.

심에서 성과 정이 비롯한다고 보든, 아니면 직접 성에서 정이 발한다고 보든, 성은 “사람에게 주어진 천 ”임으로써 4단[인 · 의 · 예 · 지 또는 측은(惻隱) · 수오(羞惡 : 不義를 부끄러워하고 不善을 미워함.) · 사양(辭讓) · 시비(是非)] 또는 오상(五常)의 근본으로서 인간미덕으로 긍정되고 있다.

그러나 다같이 심에서 발하고 성에서 발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언제나 인간 덕목으로 간주되고 있지는 않다. 이 경우 물론 정이 성에서 발한다고 보는 견해는 정을 인간악덕과 일방적으로 연관짓지 못한다.

“성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것이 본래 착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심이나 성이 “정을 거느리지 못하면……정이 방탕하기가 쉬운 것”이라는 퇴계의 주장이 보여주듯, 정은 성과는 달리 선과 악 사이를 넘나든다고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정이 발할 때에 도의(道義)를 위해서 발하는 것이 있는데, 어버이에게 효도하려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려 하고 어린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측은히 여기고,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미워하고, 종묘를 지날 때는 공경하게 되는 것들이 그것이니, 곧 도심(道心)이라는 것이다.

정이 발할 때에 입이나 몸 따위를 위해서 발하는 것이 있는데, 배고프면 먹으려 하고 추우면 입으려 하고 힘들고 괴로우면 쉬려 하고, 정(精)이 성해지면 여자를 생각하는 것들이 그것이니, 곧 인심이라는 것이다.

”(人心道心圖說) 이와 같이 율곡은 정을 ‘도의를 의해서 발하는 것’과 ‘입과 몸을 위해서 발하는 것’의 둘로 가름하고 있다.

전자는 윤리 또는 도덕의 범주에 들 정이고 후자는 이와는 달리, 감각적 내지 말초적 욕구의 범주에 들 정임은 분명하다.

전자 곧 ‘도심의 정’은 지나쳐도 해가 될 것이 없으나 후자 곧 ‘인심의 정’이 지나치면 방탕에 흐를 수 있음을 추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로 보아서 율곡이 ‘인심의 정’을 경계하고 있음을 지적해도 좋은 것이다.

요컨대, 율곡은 정에 선악의 기준 내지 그것에 버금을 기준을 적용시키고 있는 셈이거니와 퇴계 또한 “마음이 정을 거느리지 못하면……정이 방탕하기 쉬울 것이니,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서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성을 기르고 그 정을 절제하면 배우는 방법이 얻어질 것이다.”(退溪集)라고 함으로써 방탕에 흐를 것이기 때문에 절제해 마땅할 정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우암이 “물건을 느끼는 것은 심이요, 심이 동하는 것은 정이다. 정은 성에 근본을 두고 마음에 주재(主宰)되니, 마음이 주재를 하면 그 동하는 것이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니 어찌 인욕(人欲)이 있으랴. 오직 마음이 주재하지 못하여 정이 스스로 동하므로 인욕에 흘러서 매양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한다.”(宋子大全)이라고 하였다.

이는 주자(朱子)의 말에 동조한 것인데 역시 율곡이며 퇴계의 선례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도 좋을 것이다. 우암은 또 성은 곧 이(理)라고 보고 “작위(作爲)”나 “조작(造作)”이 없는 순연무구(純然無垢) 한 것으로 설명한 반면 정은 마음의 느낌이되,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틈에 느닷없이 돌출”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렇듯 양자를 심하게 대비시키고 있거니와 이것 역시 인간감정으로서 정이 갖춘 충동성 내지 발작성에 관해 경계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 점은 그가 “정의 물목(종류)에는 일곱이 있으니 이를 두 가지 묶음으로 나누면, 오직 좋고 궂은 것으로 나뉘어질 뿐이다.…… 희 · 락 · 애(愛) · 욕(欲)은 좋은 것이고 노 · 애(哀) · 오(惡)는 모두 궂은 것에 속한다. 칠정(七情) 가운데 그 바름을 얻은 것만을 일컬어서 사단(四端)이라고 한다.”라고 할 때도 다를 바 없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우암의 ‘칠포사(七包四)’에 관한 주장은 이른바 칠정을 사단과 별도의 범주로 묶되, 칠정을 사단에 대해 일방적으로 친화케 함으로써 그 순화를 꾀하는 다른 유학자들의 처지와는 구별된다.

유학의 경우 정은 일곱 가지로 묶여진 인간 감정이다. 그것은 워낙 성이나 심에서 비롯하는 만큼, 굳이 부정적인 인간 속성이라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식색(食色)을 탐하는 따위로 치우칠 경우 우암처럼 악의 범주에 들게 된다.

이와 같이 감각적인 탐닉에 흐르거나, 아니면 절도를 잃거나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상태로 내버려지거나 하는 경우, 정은 역시 악의 범주에 묶이게 된다.

이와 같이 정을 악으로 범주화하거나 경계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은, 정이 인간의식 · 인간유대 · 인간행위 등에 걸쳐 다각적으로 검토되어 있기는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윤리적으로 규정되어 있음에 대해 시사하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정에 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하늘에서 주어진 천성을 전제한 인간신뢰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은 강한 동양적인 휴머니즘 내지 이상주의의 표방이라고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른 바, 칠정 중에 부분적으로 경계해야 할 항목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절제되고 중용을 잃지만 않으면 4단에 버금이 될 윤리적 덕목으로 시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재(主宰)라거나 제어, 절제란 관념을 앞세워서 정을 바라본 것은 불행하게도 인간의 자기증명 나아가서 자기추구며 자기완성의 심리적 동력으로 작동하게 될 정의 탄력성을 크게, 만족스럽게 부각시키지 못한 흠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정의 다양성과 내포

정(情)은 분명히 하나의 문(文), 곧 단일 글자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문과 만나서 두 글자 및 그 이상의 글자와 합해져서 자(字)를 이루는 양상은 실로 종잡기 어렵다. 그 앙상을 생각하면 정은 하나의 문이라고 하기가 어려워질 정도가 된다. 끝없다고 해도 좋을 의미 분화며 자기 해체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가령, 애정의 정은 사랑이지만, 욕정의 정이나 정사(情事)의 정은 음(淫)이나 육(肉)과 뜻이 비슷해진다. 정담(情談)이라고 하면 남녀 사이가 아닌 경우에도 쓰일 수 있지만, 정사(情死)의 정도 반드시 남녀 사이에 한정된다.

사정(事情)이나 사정(私情)에서 정은 은근한 내용이나 비밀을 뜻할 수 있지만, 정세(情勢)나 정황(情況)에서 정은 객관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일 또는 사실을 뜻한다. ‘정탐(情探)한다’고 할 때의 정은 숨겨진 비밀스런 사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심정은 고요하거나 잔잔할 수 있지만 감정은 역시 격하기 쉽다. 정실(情實)의 정은 사사로운 것이지만, 정보(情報)의 정은 공적일 수도 있다. 정리(情理)나 정의(情義)가 되면 아무래도 사정(私情)은 물론 감정도 배제되어야 한다.

정리며 정의는 물론 정례(情禮)의 정은 사단(四端)과 공존할 수 있는 경지에서 말해진 칠정(七情)의 정과 한데 묶일 수 있을 것이다. 정감(情感)이라면 정서에 넘친 시정(詩情)까지 내포할 수 있음에 비해서 정념(情念)이라면 남녀의 연정에 치우쳐서 심지어 정염(情炎)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심정의 정은 정신이나 의식의 경지에까지 다다를 수 있음에 비해서 육정(肉情)의 정은 야성적인 충동으로 내리달을 수도 있다.

다른 문과 결합되어서만 정이 다양하게,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의미의 분화 내지 의미의 자기 해체를 거듭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자 안에서도 같은 의미 분열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정경(情景)이라고 하는 경우, 정서 어린 경관이나 상황을 의미하면서도 딱한 사정, 측은한 처지 등도 의미하고 있다. 비슷한 보기는 정교(情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참다운 우정의 경지 또는 정분의 두터움이 정교인가 하면, 남녀 사이의 남다른 애정만이 정교이기도 한 것이다.

정의 가지 수를 말할 때도, 『송자대전 宋子大全』에서 우암이 오정을 일컫고 있지만, 흔히 육정(六情)에서 칠정까지 헤아릴 수도 있게 된다.

희 · 로 · 애 · 락 · 욕(喜 · 怒 · 哀 · 樂 · 慾)이 오정이고 육정이라면 희 · 로 · 애 · 락 · 애(愛) · 오(惡)가 되고 칠정이라면 희 · 로 · 애 · 락 · 애 · 오 · 욕(慾)이다.

그러나 육정이나 칠정은 그 내포가 달라지기도 한다. 칠정이 희 · 로 · 우(憂) · 사(思) · 비(悲) · 경(驚) · 공(恐)이 되는가 하면 달리는 희 · 로 · 우 · 구(懼) · 애(愛) · 증(憎) · 욕이 되기도 한다. 오정 또한 희 · 로 · 애 · 오 · 욕으로 바뀌기도 한다.

여기다 오욕(五欲)의 다양함까지 덧붙여 생각한다면 정의 갈래는 더한층 얽히고 따라서 정의 내포 역시 섞이게 될 것이다. 감정이며 정서 그리고 욕정에 이르도록 망라될 것이니,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엇갈리고, 흉(凶)과 길(吉)이 섞어지면서 오정에서 육정 그리고 칠정까지가 이루어져 있다.

유학에서 발(發)하지 않으면 성(性)이라 하고 발하면 정이라고 했을 때, 일단 성은 체(體)가 되고 정은 용(用)이 된다는 설명이 베풀어져 왔다.

전자가 이(理)라고 하면 후자를 기(氣)라고 한다는 설명도 있어왔다. 성이 인간 마음의 본바탕이라면 정은 그 작용 내지 현상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인간 감정만이 아니라 감정을 내용으로 한 의식이며 행동에까지 정이 그 외면을 넓힐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정은 인간 본성의 일부이고 마음인가 하면 행동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의 글자 그리고 하나의 어사(語辭)로서 정은, 그 의미며 쓰임새에 걸친 차원에서 대단한 자기 분화 내지 자기 해체를 거듭하고 있다.

그것을 정의 아라베스크(arabesque : 아라비아적이라는 뜻에서 다양성을 의미함.)나 만다라(曼茶羅 : 우주 법계의 온갖 덕을 망라한 진수를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적 속성이라고 비유해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정의 자기분화는 의미의 다양한 차별성에 관한 것이고 자기해체는 그 분화의 한 끝이 대립되고 모순되는 두 내포를 지니는 데까지 다다르고 있음과 관련되어 있다.

이들 정의 자기 해체의 과정은 일부의 전형적인 보기에 불과하다. 이들 대립의 쌍은 각기,

주관적 : 객관적

사 적 : 공적

에로스 : 물리적 사실

윤 리 : 욕정

세 속 :정서

와 같은 의미론적 대립의 쌍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것이다. 세정이나 물정에 밝다고 해서 반드시 자연을 두고 유정한 사람이 된다고 보장할 수 있다. 정례를 다할 수 있어서 오히려 정염을 멀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정의(情義)를 앞세우고 보면 자신의 사정(私情)을 희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 밝음으로써 정실(情實)과 어는 정도 거리를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정보통이라고 구태여 정든 님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정의 개념들 그리고 내포들은 서로 사이에 일관된 그러면서도 차별성 있는 유대를 지속하고 있는 한편, 아예 그 유대를 단절하고 넘을 수 있는 간극을 견지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정은 결코 단일한 관념도 실체도 아니다. 정의 개념이며 속성은 오히려 변화요 변성(變成)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거기에는 물론 사회성이며 문화성이 실려져 있는 것이지만, 원천적으로는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 그 자체의 주어진 맥락에 따르는 다양한 가변성이 설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인의 인간인식과 인간관계 인식의 깊이며 다양함이 정으로 하여금 천의 얼굴, 태도를 갖게 한 것이다. 공통의 속성, 공통분모의 주소화를 초래한 만큼, 차별성을 극대화해 간 것은 이른바 ‘인심의 기틀’ 내지 ‘마음의 기미’의 사소한 개성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가령 우암이 인간마음을 ‘허령불매(虛靈不昧 : 마음이 신령하여 어둡지 아니함)’라거나, ‘허령동철(虛靈洞徹)’이라고 했을 때, 그 매이지 않는 자유를 부분적으로는 일컫고 있다고 보여지거니와 그 개념이 정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정의 속성과 상징

한국인은 한자인 정을 철저하게 토착화하였다. ‘정답다’, ‘정겹다’, ‘정들다(나다)’, ‘정떨어지다’, ‘정차다”(=정답다)’, ‘정(을)두다’, ‘정붙다’, ‘정떼다’, ‘정을주다(받다)’-이같은 일련의 낱말 및 관용구는 국어의 고유한 접미사 및 낱말을 붙여서 된 것들이지만, 이것들은 정과 완전 등가(等價)일 국어 낱말이 없는 탓에 생긴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동시에 정의 수요가 그만큼 크고 절실했기 때문에 생겨나기도 한 것이다. 그 결과 정은 한국어화하게 되고 유학에서 문제되고 있는 정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며 쓰임새를 갖추게 된 것이다.

심지어 ‘정나미’란 파생명사까지 생겨났는데, 이 경우 접미사 ‘나미’는 달리 쓰인 용례가 생각나지 않는다. 정이란 말은 토착화하면서 그 자신만을 위한 접미사마저 갖추고 있는 셈이 된다. 정은 일상 국어에서 허다하게 자주자주 쓰인다.

정은 주고받는다고 하고 정은 들고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정이 뜨거워진다거나 식는다고도 한다. 달리 정은 훔치기도 하고 떼기도 한다. 떨어지는 게 정이면 붙는 것 또한 정이다. 도타운가 하면 성긴 것 역시 정이라고 일러왔다.

사람 사이의 정이 있는 한편, 사랑과 땅 사이에, 사람과 사물 사이에도 정은 오간다고 표현해왔다. 정의 작용이며 성질 그리고 기능이 다양하게 일상국어에 반영되어 있다. 이런 다양한 정이란 말의 쓰임새는 한국인이 정을 두고 그 냉온, 후박(厚薄), 강약, 질기고 허술함, 그리고 친소 또는 생숙(生熟)을 가름해왔음에 대해 증언해 주고 있다.

정에는 온기(훈기) 이외에 탄력성, 멀고 가까움의 거리감이 있고 설익음과 익음, 두텁고 얇음, 부드럽고 거침 등의 질감(質感)이 묻어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구수함이라는 미각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이 낱말의 의미와 어감에 고루 작용하고 끼쳐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의 표정, 감각 그리고 그 속내가 다양함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정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곱고 두텁고 가까울 때, 또한 구수할 때 그리고 질길 때 한국인의 마음을 매우 흡족하게 하였다.

그것은 정이 매우 감각적인 것임에 대해서 말하거니와, 그것은 이로써 정은 마음만이 아니라, 삶이며 생활에 걸친 충족, 성취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따뜻함 · 부드러움 · 고움 · 두터움 · 가까움 · 질김이 따로따로 경험되기도 한 것이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겹쳐서 두리뭉실 하나로 감각되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 그 낱말 중의 어느 한둘만을 골라서 정을 표현하거나 경험했다고 해도 입 밖으로 나타내지 못한 나머지 것들이 은연중 포함되곤 했던 것이다.

“차마 여성으로 겪기 어려웠을 고비가 거듭되었는데도, 또 외할아버지가 돌아간 다음부터는 포원과 인종의 나날이었겠는데도, 늙어서 오히려 깊은 주름 사이에 아름다움이 가시지 않았던 얼굴에서 언제나 자애로운 웃음이 떠난 적을 본 일이 없다. 누구에게나 그저 어질고 착하던 외할머니였지만, 친외손들 사랑하기란 말할 나위 없고, 외손으로 맏이인 나에겐 자별하셨다.” (예용해, ‘이바구 저바구’에서)

이런 대목은 한국인의 정다움의 전형을 갖추고 있다. 자애로움 ,어질고 착함, 사랑 등은 이 경우 정다움의 또 다른 기호들이다. 이 대목은 또한 인간 품성의 극진한 선량함이 곧 정겨움임에 대해서도 익히 시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다음 시에서도 한국적인 정의 전형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솔포기에 숨었다.

토끼나 꿩을 놀래주고 싶은 山(산) 허리의 길은

앞대서 따스하니 속녹이고 싶은 길이다.

개 데리고 호이호이 휘파람 불며

시름 놓고 가고 싶은 길이다.

괴나리봇짐 벗고 땃불 놓고 앉아

담배 한대 피우고 싶은 길이다.

승냥이 줄레줄레 달고 가며

덕신덕신 이야기하고 싶은 길이다

더꺼머리총각은 정든 님 업고 오고 싶은 길이다.(백석, ‘昌原道’)

여기서 “따스하니 손녹이고 싶은”, “시름 놓고 가고 싶은”,“땃불 곁에서 담배 한대 피우고 싶은”, “덕신덕신 이야기하고 싶은” 은 모두 필경은 “정든 님 업고 오고 싶은”과 동격이다. 그것은 정다움이 구체화된 이미지들을 모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평화 · 안식 · 안락 · 온정 · 공감 · 동정 · 연민 · 위탁(委託) 등의 감각을 한국인은 정의 내포로 삼아왔다. 이런 감각은 다음 시에서 보듯, 다사로움과 빛으로 표상될 수도 있다.

빛은 헤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그대 손을 잡으면

거기 따스한 체온이 있듯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사랑의 빛을 안다

마음속에 하늘이 있고

마음속에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사랑이 있어

어둡고 추운 골목에는

밤마다 어김없이 등불이 피어난다. (문정희, ‘체온의 시’에서)

이 시에서 사랑을 정으로 바꾼다고 해도 한국인의 일상적인 그리고 생활하는 감정으로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어둠속의 빛”, “추움 속의 따라로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시에서처럼 마음속에 깃들어 있을 때, 그것들을 한국인은 정이라고 부르는데 길들어져 왔다.

정은 마음의 훈기요 빛(밝음)이라고 마무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므로, 인간의 인간다움 그 자체로 귀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마음의 다사로움과 밝음이 곧 한국인의 정이다.

따라서, 한국인이 정의 상징 내지 기호로 삼을 만한 것도 이런 정의 속성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스한 손길, 훈훈한 입김, 다사로운 가슴, 뜨거운 피 등 인체 또는 인간 생리의 일부를 위시해서 구들막 · 아랫목 · 아궁이 · 화로 · 모닥불이나 숯불 등의 열관리 기구나 열이며 적절 온도의 불 등은 더없이 적절한 정의 상징물들이다.

그 밖에 따뜻한 국이나 찌개 등의 먹거리, 솜누비와 같은 옷치장 등도 상징 구실을 할 수 있었지만, 후각으로는 황토 흙내음, 메주 뜨는 내음, 저녁밥 짓는 연기의 불내음, 술익는 내음 이외에 두엄 익는 냄새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청각으로는 여치나 귀뚜라미 소리, 개울물 소리, 문풍지 소리, 까치의 울음, 참새의 지절거림 등도 한 몫 거들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들은 한국적인 풍토가 지닌 물정(物情), 곧 사물의 정이라고 부를 만한 성질의 것들이기에 우리의 고향, 그 고샅이며 고향집 그리고 안방, 들도 정을 위한 공간상징으로 요긴한 구실을 다해 왔다. 이 모든 상징들은 한국인과 정의 교감을 나누어 온 것들이다.

한국인의 정

한국인의 정은 감정을 내포할 수 있다. 그것은 격할 수도 충동적일 수도 있다. 의외의 행동, 순간적이고 발작적인 행동까지도 유발할 수 있다. 그런 행동이 정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것에 떠밀린다고도 하고 그것에 몸을 내맡긴다고도 한다. 폭발한다거나 탄다고도 물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은 감정일 수도 있는 만큼, 의식일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는 일방적으로 정에 의해서만 지배되어 있고 정으로만 충전(充電)되어 있는 의식도 지각될 수 있다. 그것은 자아에 걸리기도 하고 타자에 걸리고 그 양쪽에 다 걸리기도 한다. 전적으로 감정의 내용만으로 타인이 의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아의식인 한편, 그것이 타자와 연관될 수 있고 타자에 대한 관계 그 자체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정은 인간관계, 나아가서 그 관계의 유형에 터잡은 사회성을 형성한다.

정의 대인관계 내지 인간관계가 한국인에 의해 향유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에토스(ethos : 인간의 지속적인 성격의 면)’라고 바꾸어 부를 수도 있는 인품의 내용일 수 있는 것은 물론, 윤리적인 함축성까지 갖추고 있다.

실제로 한국 문화를 규정지을 때 한국을 우리들 스스로 ‘정의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의 유대에 의해서 지켜진 사회성이 한국에는 있어온 것이다. 정은 실제로 윤리적인 덕목이 되고 심지어 규범으로까지 격상되었다.

스스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면서도 그 질을 잘 관리해서 함양해야 옳을 가치규범으로서 존중되었다. ‘인정머리 없는 놈’은 인비인(人非人 : 사람이면서 사람 같지 아니함)과 같은 뜻이었다.

정이 의식이자 윤리며 인품 그리고 사회성이기도 하다는 점은 각별히 강조되어야 한다. 정과 동의어인 인정은 특히 이와 같은 사회성과 그것과 연관된 인간성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거의 토착적인 한국어가 된 정은 이런 경우 인정이다.

그러므로, 정이 집단적인 의식이면서 문화적인 의식이란 것까지 유추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와 같은 정은 일차적으로 가족 공동체에서 함양된 것임을 한국의 전통사회는 보여 주고 있다.

정은 무엇보다 ‘피의 정’, ‘혈연의 정’으로서 자라나고 또 가꾸어진 것이다. 피붙이 · 육친 · 혈친 등은 정과 거의 등가로 쓰이는 기호들이다.

실제로 ‘피붙이의 정’이란 말이 쓰이고 있고 ‘혈육의 정’이란 말도 쓰이고 있다. 그런 뜻에서 정은 무엇보다도 집안의 애정이다. 한 핏줄이기에 한 몸같이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은 배양되었다.

이럴 경우, 정은 동양유학의 이른바 7정이나 서구의 ‘감정(affekt)’ 내지 ‘파토스’와 그 내포나 외연이 전적으로 같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혈육이며 피붙이의 정은 애정이나 온정의 정이고 사랑 하나에 집약되기 때문이다. ‘희로애구오욕’ 중의 ‘애’ 하나에 배타적으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4단 중의 측은 또는 인(仁)과 겹쳐질 몫이 보다 더 큰 것이 곧 정이다. 마을 공동체는 동시에 가족 공동체 아니면 가족 공동체에서 성격이 유추될 수 있는 유사 가족 공동체였다.

전자는 이른바, 집성촌(集姓村)을 가리키고 후자는 ‘각성받이 마을’을 가리키지만, 후자라 할지라도 그 구성원들은 서로 이웃 아저씨 · 아주머니, 혹은 옆집 형 · 동생으로 호칭되었고 그 호칭에 어울릴 인간관계를 지속해 왔다.

이런 마을에서 인간관계의 ‘내적인 끈’인 정은 구심적으로는 매우 강인하고 따뜻한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배타적이고 때로 몰인정할 수도 있었다. 한국인이 정붙이고 사는 곳의 원향이 곧 마을이다. 정들이고 살거나 정을 두고 사는 사람의 으뜸이 곧 가족이다. 피와 거의 등가의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

가령 ‘정을 뗀다’는 말은 부모의 죽음을 두고도 사용한다. 부모의 죽음 그 자체가 이미 ‘정뗌’이라고 한국인에게는 관념화되어 있는 셈이다.

이 경우 정의 오고감이 없는 상태가 죽음이라고까지 말해도 좋을 것이다. 부모의 시신을 염을 할 때, 시신 전체며 그 얼굴을 직시함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장에 굳이 상주가 참여하는 것은 ‘정을 떼기 위함’이라고 전해져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부모 자식 사이의 이른바 연줄의 단절을 의미하기에 정은 연줄이고 핏줄이고 그리고 심지어 부모 자식이 된 사실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자식을 부모가 먼저 여의게 될 때도, ‘자식놈이 모질게 정 떼고 갔다.’는 표현을 쓴다. 핏줄과 정줄은 같은 뜻의 말이다. 마을 및 가족 공동체의 품안에서 정은 강한 구심력을 행사하면서, 가족과 마을의 자기증명(identity)에 이바지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정은 혈연이면서 지연(地緣)일 수 있었다. 정을 둔 사람들이 있듯이, 정을 붙인 마을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강조해서 한국인의 정을 인정의 정과 향정(鄕情) 내지 ‘흙정’의 정으로 양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농업 공동체의 결속과 생산성에 이바지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이 경우 조상이 대대로 묻혀 있고 나 또한 거기 묻히리라는 관념이 흙정과 인정을 한데 묶을 수 있었음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국인의 정은 이렇게 해서 생사 및 인간과 자연 사이를 넘나들 수 있었다.

이로 보아서 한국인의 정은 혈연과 지연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증명이면서 강한 귀속감의 표시다. 전통 농어촌을 공동체라고 부를 때 말할 것도 없이 혈연(유사 혈연, 유사 친족관계)과 지연을 공통으로 나누어 갖고 같은 문화전승(신앙 · 관념 · 관습 · 가치관 · 전설 · 노래 등)을 나누어 갖고 있음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한국 농어촌의 경우는 정의 나누어 가짐을 크게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의 마을은 ‘정의 공동체’란 말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증명과 귀속감의 표상인 정을 전하여 받고 나누어 갖고 또 지켜나가기 위한 온상으로서 한국인은 마을을 이룩하고 거기서 생활해 왔다고 해도 지나침은 없다.

정을 가꾸고 지키는 여부에 마을의 사회성과 문화가 걸려 있다고 해도 역시 과언은 아니다. 농촌마을의 계나 향약은 물론 경제 및 법제(法制)에 걸친 공동체를 보장하는 조직과 규범이었으나 그것들은 동시에 정을 지켜내는 담장이나 울타리 노릇을 도맡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는 그 대로 ‘품앗이’ 및 ‘두레’에도 적용될 수 있다. 품앗이는 여성들에 의해 운영, 관리되는 소규모의 상호 협동체 내지 협업체다.

관혼상제 기타의 큰 행사는 품앗이가 활용되는 대표적인 현장을 이룩하는 것이지만, 이로 해서 한 가정의 길흉사는 마을 안의 길흉사가 되고 그만큼 이웃간의 정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

‘이웃사촌’이라 말은 이로써 구체화되는 것이지만, 그로써 정은 소규모로나마 ‘아가페(agap○ :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실현되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경지에까지 신장될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품앗이’의 품은 물론 ‘품팔이’에서 또는 ‘품을 사다’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노동이라든가 일이라는 뜻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 노동의 품앗이에 의해 마을 안을 하나의 큰 품이 되게도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두레는 남성이 중심이 된 밤마을다운 협업체다. 실제로 성년 남성은 한 마을 안의 두레패다.

그는 두레패의 일원으로서 마을 공동체에 속해 있는 만큼, 그에게 마을은 곧 두레패요 두레패는 곧 마을이다. 과거의 농촌 마을에서 두레는 성년 결사(結社) 내지 성년 단체였다.

구태여, 마을 안의 화랑도(花郞徒, 신라)요 경당(扃堂, 고구려)이었다고 해도 그 비유는 결코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마을 안의 미성년은 예외 없이 두레의 결사에 입사함으로써 성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른됨이나 참사람됨은 곧 두레패됨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두레의 이와 같은 성격은 근대에까지 전해지지는 않았고 다만 머슴들의 두레 입사에 겨우 그 유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이 두레는 자연발생적이면서도 토착적인 농촌 협업체였던 만큼, 그 구성원들의 자기증명과 귀속감 형성에 이바지하였음은 자명한 일이다. 혈연과 지연이 바탕에 깔린 운명공통체로서 두레가 정의 유대 강화에 이바지하였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정은 가족과 씨족 그리고 마을에까지 걸쳐서 혈연이며 지연과 겹쳐서 그리고 문화연(文化緣)에도 걸쳐서 가꾸어지고 다져지고 또 지켜져 왔다. 그만큼 마을 구성원의 자기증명과 귀속감을 촉진하기도 하였으므로, 이것을 정의 구심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심력이 강한 만큼, 그 강도에 비례해서 원심력의 강도가 감소될 수 밖에 없었다. 가족 공동체의 정에서 마을 공동체의 정이 되었을 때, 한국인의 정이 아가페 구실을 할 가능성은 내포되고 있었으나 그 가능성이 크게 활성화된 것 같지는 않다.

구심력이 강한 만큼 배타적이 되어간 정의 역기능에 대해 전적으로 모른 척하기는 어렵다. 한국이 근대화-산업화하고 더불어서 대중사회화해가는 역정 속에서 한국인은 얼굴도 피도 안 통하는 이질의 다중사회로 내던져졌다.

더 이상 정이 통하지 않을 사회 환경에서 정은 그 배타성을 일방적으로 부풀려간 일면도 없지 않다. 시민사회의 윤리, 공정한 경제의 규율이 미처 들어서지 못한 사회윤리의 공동 속에서 정은 사회적 역기능을 증폭하고 그만큼 사회적 파탄을 부채질하였다는 비관적 판단도 전적으로 무시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물론, 향토 모임(동향 모임) · 씨족 모임(종중 모임) · 동창회 등이 나서서 도시 사회에 정이 이식될 여지를 조금은 넓혀갔다고는 보여진다. 그것은 ‘정의 사회’에 길든 한국인의 최후의 몸부림 같은 것이었으나, 아무래도 몸부림 이상의 것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보여진다.

오늘날, 정이 메말랐다고 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들 여러 모임은 향수를, 고향과 정에 대한 향수를 부분적으로 또 잠정적으로 달랠 수 있었을 뿐이다.

문학에 나타난 시정

한국인의 정은 사람의 정인 인정, 사물에 대한 정인 물정 그리고 세상에 대한 세정 등으로 가름될 수 있으나, 이 가운데 세정은 ‘세정이 든다’는 말이 ‘철든다’와 같은 뜻임을 미루어서 세상 물정에 관한 식견이나 경륜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물정 또한 세정 비슷하게 세상 문물에 관한 식견이며 경륜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자연 그 자체 및 자연의 사물에 관한 물정은 한국인의 심미(審美)적 체험 속에서 길러진 몫이 크다.

그 정은 한국인의 시정(詩情)이며 서정에 이바지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시들, 시조며 가사들에서 혹은 소리(민요)에서 정이라면 물론 일차적으로는 사랑, 남녀간의 애정이다.

어름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 주글만뎡

어름 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 주글만뎡

졍(情)둔 오ᄂᆞᆳ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고려가요인 「만전춘」의 한 토막에서는 이와 같이 ‘사랑하다’와 거의 같은 뜻으로 ‘정두다’를 쓰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가 하면, “어뎌 내일이여 그릴줄을 모르던가/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구ᄐᆡ야/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라고 한 황진이(黃眞伊)의 시조에서 정은 곧 연정이다. 비슷한 보기들을 시조에서만 찾아도 거의 끝이 없을 정도로 많이 눈에 띈다.

“금세상에 못할거슨 ᄂᆞᆷ의집 님○ 다정드러 놋코 말못ᄒᆞ니 ᄋᆡ연ᄒᆞ고 ᄉᆞ정치 못ᄒᆞ니 죽갓고나”

“님이 오마ᄒᆞ거ᄂᆞᆯ 저녁 밥을 일지어먹고 중문나서 대문나서 地方(지방)우희 치ᄃᆞ라 안자 以手(이수)로 加額(가액)ᄒᆞ고 오ᄂᆞᆫ가 가ᄂᆞᆫ가 건너산 ᄇᆞ라보니 거머흿들 셔잇거ᄂᆞᆯ 져야 님이로다 보선버서 품에품고 신버서 손에 쥐고 곰ᄇᆡ님ᄇᆡ 님ᄇᆡ곰ᄇᆡ 천방지방 지방천방 즌ᄃᆡᄆᆞᄅᆞᆫᄃᆡ ᄀᆞᆯᄒᆡ지말고 위뎡충창 건너가셔 情(정)엣말 ᄒᆞ려ᄒᆞ고……”

“잇자ᄒᆞ니 情(정) 아니요 못이즈니 病(병)이로다”

이와 같이 두 편의 사설시조, 한 편의 평시조 속의 ‘정드러 놋코’, ‘情엣말’, ‘情 아니요’에서 정은 예외 없이 남녀의 애정이다.

그러나 “山頭(산두)에 閑雲(한운)이 起(기)ᄒᆞ고 水中(수중)에 白鷗(백구)이 飛(비)이라/無心(무심)코 多情(다정)ᄒᆞ니 이 두 거시로다/生(생)애 시르믈 닛고 너를 조차 노리로라”한 이현보(李賢輔)의 시조에서 다정(多情)의 정은 감정이입의 결과 자연물이 향유하게 된 것이다.

동양적인 시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감물(感物)의 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적 자아인 인간이 자연에 감물함으로써 자연객체가 유정한 주체로서 시적 자아와의 사이에서 일종의 간주관성(間主觀性)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서 정은 시적 체혐의 내용이 되고 서정과 동의어가 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시적 자아는 무심과 다정을 대척적인 것으로 맞세우면서도 그 사이에 통로를 열어놓고 있다. 무심한 무기체를 유정이게 전환시키는 것, 그것을 시조는 그 자체의 서정성으로서 오랫동안 견지해 왔다.

그런 점에서 다음 시조는 위에 보인 시조와 필경 동공이곡(同工異曲 : 재주나 솜씨는 같으나 그 표현한 내용이나 맛이 다름.)의 관계에 있음을 지적해도 좋을 것이다.

“玉峯(옥봉)ᄋᆡ ᄂᆞᄂᆞᆫ 구름 가지말고 게 있거라

네 비록 無心(무심)ᄒᆞᆫᄃᆞᆯ 나ᄂᆞᆫ 보매 有情(유정)ᄒᆞ다

구름도 드롬이 잇던디 長繞嶺上(장요영상)ᄒᆞᄒᆞ다” (安瑞羽)

무심한 자연과 유심한 인간 사이의 상호 침윤에 의하여, 자연이 유정한 것의 주체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秋江(추강)에 밤이드니 물결이 차노매라/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돌아 오노매라”와 같이 직접적으로 유정의 징표가 노출되어 있지 않고 무심만이 징표화되어 있을 때 역시 무언의 감물 곧 무언의 유정이 함축될 수 있다.

무심을 굳이 유정하다고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경지에 은연 중 담길 수 있는 유정의 경지가 이 시에 가득 실려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磯頭(기두)에 잠이 들어 깨다ᄅᆞ니 ᄃᆞᆯ빛이라/竹杖(죽장) 빗겨 짚고 玉流(옥류)를 건너오니/石橋(석교)에 나는 소리를 자는 새만 아놋다”라고 할 때 이 시에는 유정은커녕 무심하다는 말조차 드러나 있지 않다.

정의 시학을 논란할 여지가 전혀 없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음향과 영상(影像)의 빛이 공감각하는 가운데서 시적 자아의 지팡이 소리와 자는 새가 호응하고 있다.

구태여 무심의 대체물을 찾자면 ‘잠’인데 새는 잠을 뛰어 넘어서 사람의 소리에 감응하고 있다. 잠과 현실, 내면세계와 감각세계 사이가 절실하게 서로 호응하고 있다.

그 호응이 바로 ‘아놋다’에서 최종적으로 울림하고 있다고 본다면 가는 새가 유정인 것은 의심할 나위 없게 된다. 바로 이 시에서 우리들은 시조에서 결정(結晶)된 한국적인 시정의 정화(精華)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미적 체험인 한국인의 정의 정화라고 바꾸어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미적 체험 내용을 이루는 정이 한국인의 정의 승화된 한 범주임은 의심할 나위 없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신적 · 정서적인 탯줄인 정이 가장 아름답게 우아미(優雅美)의 경지에까지 정화되고 승화된 경지가 여기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시정으로 한국인은 자연과 공존해 왔다. 자연을 또 다른 주관으로 삼아서 함께 생존해왔다.

이 경지에서 한국인의 정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및 자연 그리고 세계와의 사이의 해조요 조화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주관이 타자와 또는 객체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균정(均整)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필경 정은 한국인이 인간과 인간끼리 사이에서 맺은 내적인 유대(끈 · 줄)다. 좁게는 피며 인연(연줄)과 등가(等伽)이고 크게는 인간관계와도 등가이되 인간다움을 확인할 수 있는 인간적인 것의 내면적 기틀이 정을 주고 받는 사람 사이에서 확인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 때문에 삶의 희비가 엇갈리고 기복(일고 기움)이 서로 갈리기도 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사람들 속의 사람, 사람과 더불어 사람으로서 갖추고 누리고 베풀고 해야 옳을 인품이며 덕성을 내포한 지고지순한 이데아(idea : 인간이 지향하는 가장 완전한 상태나 모습)이기도 했던 점 또한 당연하다.

그것이 마침내 인간과 사물,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유추되어서는 세계 속의 인간, 사물과 더불은 인간이 향유하고 있을 미적 체험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미적 체험은 역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전이될 성질의 것이면서, 아울러 워낙 인간과 인간 사이에 내재되어 있었을 성질의 것의 또 다른 구현이기도 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고려사 악지(高麗史 樂志)』
『양기제산고(兩棄齊散稿)』
『퇴계집(退溪集)』
『율곡집(栗谷集)』
『송자대전(宋子大全)』
『백석시전집』(백석, 창작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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