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구락부 ()

근대사
단체
1894년(고종 31)서울에서 조직된 구미인들의 사교친목단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1894년(고종 31)서울에서 조직된 구미인들의 사교친목단체.
개설

국내인으로 이 구락부에 가입한 회원은 민영환(閔泳煥)·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서재필(徐載弼)·이완용(李完用) 등이었다.

외국인으로는 미국공사 실(Sill,J.M.B.,施逸)과 프랑스영사 플랑시(Plancy,C.de.)를 비롯해 당시 한국 정부의 고문으로 초빙된 다이(Dye,W.M.)와 리젠드르(Legendre,C.W.),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H.G.)와 아펜젤러(Appenzeller,H.G.) 등이 있었다.

기능과 역할

구락부의 주요 회원으로 일본인들이 전혀 가담하지 않은 사실로 미루어, 열강 세력의 성쇠 속에서 친구미파 인사와 주한구미외교관들의 연대를 위한 연락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행하였던 것 같다.

이들은 러시아·프랑스·미국·영국 등의 외국 공사 및 참서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짐은 물론,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 등과도 접촉해 구미 세력과의 협력에 노력하였다.

특히 러시아를 비롯해 구미 열강의 힘을 빌려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려 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비밀리에 신하들을 이 구락부에 보내 친분을 맺게 하고 또 시종들을 보내어 호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구미인들의 사교장이었던 정동구락부가 조선인과 구미인들의 외교장으로 바뀌자, 일본은 왕궁호위병을 일본군 지휘하의 훈련대 병정으로 교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왕궁호위병 교체 기도는 러시아·미국공사의 항의와 고종의 거부로 실현되지 않았다.

1895년 8월에 제3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성립되어 친일파 각료들이 배제되는 대신 친러파로 지목되는 이완용·이범진(李範晉) 등이 입각하자, 정동구락부를 중심으로 한 서울 시내에는 고관이 암살되리라는 풍문이 유포되었다.

결국 1895년 10월 초 일본공사관에 의해 획책된 명성황후 일파와 친러파에 대한 거세 음모는, 조선 정부가 정동구락부를 중심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구미 열강과 손을 잡지 못하도록 하려는 고육책이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순종실록(純宗實錄)』
『서재필박사자서전(徐載弼博士自敍傳)』(김도태, 수선사, 1948)
『호암전집(湖岩全集)』 1(문일평, 일성당서점, 1948)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