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교 ()

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효행으로 천거되어 정려문이 내려진 학자.
이칭
대천(大遷)
외암(畏庵)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33년(영조 9)
사망 연도
1821년(순조 21)
본관
동래(東萊)
출생지
김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효행으로 천거되어 정려문이 내려진 학자.
개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천(大遷), 호는 외암(畏庵). 김제 출생. 아버지는 정천배(鄭天培)이며, 어머니는 나주나씨(羅州羅氏)이다. 큰아버지 정천기(鄭天基)에게 입양되었으며, 송명흠(宋明欽)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세에 생부가 어떤 여인의 무고로 억울하게 죽었는데, 오랫동안 원수를 갚고자 노력하다가 16년 만에 원수를 갚았다. 그 뒤 자수하여 감옥에 들어갔는데 인근 선비들의 호소로 풀려나자,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렸으므로 효자비라고 하였다.

‘진심성의(盡心誠意)’ 네 글자로 생활의 지표를 삼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세상이 점차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다. 뒤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정려의 은전이 내렸다.

참고문헌

『매산집(梅山集)』
『외암집(畏庵集)』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