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수(大受), 호는 양암(陽菴)·양재(陽齋)·원촌(源村).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8대손으로, 찰방(察訪) 정지화(鄭至和)의 5대손이며, 정찬선(鄭纘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형운(鄭亨運)이고, 아버지는 정문상(鄭文祥)이며, 어머니는 이사제(李思悌)의 딸이다. 이재(李載)의 문인이다.
1750년(영조 26) 사마양시에 모두 합격하고, 다음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754년에는 횡성현감으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교리·승지 등을 지냈다.
승지로 있을 때 1761년 4월 장헌세자(莊獻世子)가 영조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 순행하고 돌아오자 영조는 세자의 서유(西遊)에 관여한 심벌(沈橃)·유한소(兪漢簫)·이수득(李秀得) 등을 파면시켰는데 이 때 그도 파면되었다.
그 뒤 다시 등용되었으나 1772년 당론을 주장하였다 하여 북청으로 정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관계에 복귀, 이조판서를 지냈다. 1775년 홍인한(洪麟漢)을 탄핵하는 소를 올려 세손을 보호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시파(時派)로서 우의정에 발탁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781년『영조실록』과 『경종수정실록』 편찬의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겸직하였고, 다음해 동지사(冬至使)로 부연(赴燕),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다시 우의정으로 세자사부(世子師傅)를 겸하였다.
1791년 영의정에 이어 영중추부사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철저한 시파로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