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평(彦平), 호는 포신(逋臣). 아버지는 목사 정효안(鄭孝安)이며, 어머니는 소감(少監) 유찬(柳瓚)의 딸이다. 종숙인 우의정 정분(鄭苯)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깊어 이름을 떨치더니 1445년(세종 27)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450년에 호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현감으로 나갔다가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와 그의 양아버지인 정분을 죽이자 벼슬을 버리고 공주 동혈(銅岤)에 들어갔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몇번이나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양어머니 정씨(河東鄭氏)를 그곳에 모셔 지성으로 봉양하니 사람들이 그 집을 가리켜 충효의 가문이라 하였다. 단종이 비명에 죽자 항상 영월 쪽을 향하여 앉아서 옛 임금을 사모하였다.
1459년(세조 5)에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단종과 단종을 위하다가 죽은 충신들의 넋을 동학사(東鶴寺)숙모전(肅慕殿)에 초혼하여 제향하였다. 산채와 어류를 캐고 잡아 숙모전의 제향을 받들면서 「채미가(採薇歌)」와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읊기도 하였다.
뒷날 정조 때 판서에 증직되고, 충신·효자의 정려가 내려졌다. 장릉(莊陵) 충신단과 동학사 숙모전 서무(西廡)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