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순 ()

송도지
송도지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경상도관찰사, 예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기천(祈天)
사어(四於)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27년(영조 3)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온양(溫陽)
주요 관직
예조판서|판중추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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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경상도관찰사, 예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기천(祈天), 호는 사어(四於). 정염(鄭염)의 후손이며, 정순양(鄭純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수연(鄭壽淵)이고, 아버지는 정광은(鄭光殷)이다. 어머니는 김시경(金愼慶)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출사하여 1762년에 지평이 되고, 1763년에 호서감운어사(湖西監運御史)로 나가 조운(漕運)의 실태를 살폈다. 이어 정언이 되었을 때 일시 귀양간 일이 있고, 그 뒤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으로 나갔다. 1766년 부교리 재임 중 협잡했다는 죄로 삭직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다시 복직되었다. 2년 뒤에 수찬이 되었으며, 1772년에는 대사간에 올랐다.

정조가 즉위하자 승지로서 고부 겸 청시승습부사(告訃兼請諡承襲副使)가 되어 청나라로 건너가는 도중에 열하(熱河)에서 관향은(管餉銀) 1,000냥을 분실한 사건으로 일행과 함께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등용되어, 1777년(정조 1) 대사헌이 되었다. 이 때 조정을 청신하게 할 것, 재정을 절약할 것, 기강을 확립할 것, 언로를 열어놓을 것, 현관의 대우를 개선할 것, 인재를 양성할 것 등을 상소하여 정조에게 청납되고 녹비를 하사받았다.

그 뒤 방백으로 함경감사가 되어 재해지의 전결(田結)을 임의로 분배한 사건 때문에 일시 파면되었다가, 다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인 1785년 선조인 정렴 · 정작(鄭碏) 등의 유문을 보유하여 간행, 그들의 행적과 도가적 분위기를 전하였다.

1790년 선혜청제조로 있을 때 양전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부분적인 시행을 보았다. 이후 사직을 거쳐 예조판서로 승진했다가 일시 사퇴한 뒤 다시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782년 『송도지(松都誌)』와 『송도잡기(松都雜記)』의 두 책을 합편, 증보했고, 특히 왕명으로 1784년 『동문휘고(同文彙考)』를 찬집하였다.

다음해에는 『십구사략통고(十九史略通攷)』를 편집하는 등 학자 · 문장가로서 인정받았다. 1806년(순조 6) 우의정 김달순(金達淳)이 사사되고 김한록(金漢祿) 등에게 역률(逆律)이 추시될 때 이에 연좌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북창고옥양선생시집(北窓古玉兩先生詩集)』
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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