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시해(時偕). 호는 화암(花巖). 참판 정광경(鄭廣敬)의 현손이며, 정지화(鄭至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재후(鄭載厚)이고, 아버지는 지평 정제선(鄭濟先)이며, 어머니는 이상연(李尙淵)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04년 송시열(宋時烈)의 뜻을 받들어 유생 160여명과 함께 명나라 신종(神宗)의 사우(祠宇)를 세울 것을 상소하여 처음으로 금원(禁苑)에 황단(皇壇)를 건립하게 하였다. 참봉·세마(洗馬) 등을 역임하고, 전라도 금구현령과 김제군수를 거쳤다.
1719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자궁(資窮)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오르고, 동부승지가 되었다. 경종이 즉위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있었는데, 이무렵 김일경(金一鏡)이 경종의 생모 희빈장씨(禧嬪張氏)를 위하여 호(號)를 정하고 사우를 세우려 하였다.
그러자 그가 항소(抗疏)하여 불가함을 주장하다가 신임사화 때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김해로 유배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다음해인 1725년 배소에서 대사간으로 기용되어 언관의 중책을 맡았다.
이 무렵에 궁위(宮衛)와 보사(輔嗣)를 엄하게 할 것을 소론(疏論)하였는데, 이는 권귀(權貴)를 꺼리지 않는 주장이었다. 이듬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부연(赴燕),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7년(영조 3) 도승지·대사성·대사헌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다가 이 해에 소론이 재등장한 정미환국으로 파직되었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평안감사로 나갔다가 예조판서에 승진하였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우참찬으로 재직하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