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의백(毅伯). 정재후(鄭載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제선(鄭濟先)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정형익(鄭亨益)이며, 어머니는 김상기(金相器)의 딸이다.
1726년(영조 2)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때 아버지 형익으로부터 당쟁에 가담하지 말도록 자중하라는 훈계를 받아 벼슬을 사임하고자 하였으나, 1728년에 탕평을 이루고자 하는 왕의 특명에 따라 부수찬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소를 올려, 당쟁이 나라를 망치는 근본이라는 것을 적시하면서 보다 강력한 탕평책을 펼 것을 주장하였다. 그뒤 당쟁에 의하여 억울하게 희생된 4대신 등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주장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대정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진에 이배되었다.
그 뒤 탕평책이 점차 이루어지자 그도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객사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