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건중(建中), 호는 중재(中齋). 아버지는 정대기(鄭大基), 어머니는 강릉유씨(江陵劉氏) 유언시(劉彦時)의 딸이다. 강릉군 덕방면(德方面) 청량리(淸凉里)에서 태어났다.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이며 스승이 죽은 뒤엔 손위 동문인 유인석(柳麟錫)을 스승으로 모셨다.
8∼9세에 칠서(七書)를 다 볼 정도로 재주가 있어 ‘강릉 땅에 율곡이 났다’는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13세에 서울에 가서 강(講)을 받는데 배강 도중에 그 목소리에 반한 시관이 ‘너 술 한 잔 할 줄 아느냐’고 하자 ‘대장부가 어찌 됫술을 사양하겠습니까’하고 받아 마시고 나서 배강을 계속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배짱이 두둑했다.
유중교가 죽고 난 뒤 1894년 춘천으로 가서 동문 선배인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유인석의 문인이 되고 중재란 호를 받았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이 발생,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했으나 의병의 세력이 약화되자 이실곡(李實谷)과 함께 천진에 들어가 원세개(元世凱)를 만나 구원을 요청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에 실망해 중국 각지를 유람하고 귀국, 묘향산·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울분을 달래었다.
1897년 봄에 『성재문집(省齋文集)』 간행에 참여한 뒤에 중국의 관전호로두(寬甸呼蘆頭)로 들어가 유인석을 만났으며, 8월에 귀국했다. 9월에 유인석이 체포되자 진정소를 올렸고, 이듬해 1898년 2월엔 중국으로 떠나는 유인석을 강릉 경포대에서 전별했다.
5월에 자신의 재산을 털고 사우(士友)들로부터 얼마의 자금을 마련, 세 차례나 압록강을 넘어 도생산(道生山) 오도서사(五道書社)에 있는 스승을 도왔으나 병이 나서 그 곳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중재유고(中齋遺稿)』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