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이란 농업을 관장, 수호하는 신으로 이 제의는 ‘제석동산’이라는 곳에서 지냈다. ‘동산’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그 제장(祭場)이 마을 근처 높은 언덕에 위치하여 있었다.
제석동산에는 보통 제단이 축조되어 있지 않은 것이 일반이지만, 반석으로 제단을 만들고 돌로 울타리를 둘러놓은 곳들도 있다.
거의 마을마다 제석동산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모든 마을에서 이 제를 지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의 조사로 알 수 있는 것은 섬의 동남부 성산읍 일대의 마을에서 광복 직후까지 지냈다는 사실뿐이다.
그 때의 제의 모습을 보면 제일(祭日)은 조 파종 직후나 메밀 파종 직후에 하는 곳, 또는 그 파종 직전에 하는 곳, 7월 14일에 하는 곳 등이 있으나 어느 것이든 파종한 종자의 생육과 관계 깊은 시기이다. 당시까지는 마을마다 용인(傭人)이 있어 마을의 심부름을 하였는데, 이 용인이 제의 준비를 하고 제를 맡아 지냈다.
즉, 제의 시기가 가까워오면 용인이 향장(鄕長)에게 가서 제일을 정하여 받고, ‘제석제 제물 받는다’고 하여 마을 각 가정마다 돌면서 미곡을 1되 내지 4되를 거두어다 이것으로 돌래떡·해어·오과(五果)·감주 등 제물을 준비한다.
제일이 되면 용인은 제물과 쌀·솥·물 등을 지고 제장으로 올라가서 제단 앞에서 솥에 메를 짓고 제의 시간인 자시(子時)가 되면 솥째로 메를 제단에 올리고 기타 제물을 올려서 제를 지낸다.
신위(神位)의 위치에는 지방(紙榜)을 써 붙이는 일이 없이 백지 한 장을 댓가지에 붙여 기(旗)를 만들어 꽂는 점이 특색이다.
제의는 용인 스스로가 분향, 배례하여 헌작한 뒤 숟가락을 메에 꽂아서 잠시 읍(揖)해 있다가 ‘잡식(제상의 음식을 조금씩 거두어 모으는 것)’하여 땅에 쏟는 것으로 끝내는 간단한 것이다.
제의가 끝나면 용인은 향장에게 행제(行祭)하였음을 보고하고, 향장 이하 마을 어른들에게 제물을 나누어주었다. 소멸 당시의 이 제의는 이처럼 제관이 용인으로 격하되고 제의절차도 간략화해졌지만, 본래는 온 마을주민이 제비를 갹출하고 제관을 선출하여 격식을 갖춘 마을제로 행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