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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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
개념
금속의 표면에 문양을 새기는 기술 및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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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금속의 표면에 문양을 새기는 기술 및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
내용

1970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금속기(金屬器)의 표면에 평각(平刻)·투각(透刻)·고각(高刻)·육각(肉刻)·상감(象嵌) 등의 기법으로 문양을 새기는 조각장은 조이장(彫伊匠, 또는 쪼이장)으로 불리는 것이 더욱 일반적이다.

조각일은 입사(入絲 : 그릇에 조각을 하고 금속으로 무늬를 놓는 일)와 더불어 청동기시대 이후 우리 나라 금속공예 의장기술의 중심을 이루어 온 대표적인 기술로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칼자루에 조각과 입사기법이 병용된 청동기시대의 환두태도(鐶頭太刀)를 비롯하여 삼국과 통일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각종 금속장신구들은 조각기술의 전통과 우수성을 뒷받침해 주는 좋은 예이다. 조각은 주로 고급기물에 쓰였기 때문에 그 수요층 또한 왕실·귀족 등 특수한 신분을 지닌 계층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조각장도 시대에 따라 명칭에 변화를 보이면서도 일관되게 관청수공업체(官廳手工業體)에 소속되어 제작활동을 전개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은을 다룬다 하여 은장(銀匠)의 명칭으로, 백동장(白銅匠)·적동장(赤銅匠)·생철장(生鐵匠) 등 재료별로 분류된 다른 장인들과 함께 장야서(掌冶署)에 소속되었으며, 조선시대 이후에는 기술의 성격에 따라 보다 세분화된 조각장의 명칭으로 공조의 본조(本曹)와 선공감(繕工監) 등에 분속되었다.

경공장(京工匠) 체제가 붕괴되고 개화의 추진과정에서 조각기술의 전통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1900년대 초에 경공장의 체제를 일부 계승한 미술품제작소가 이왕직(李王職)의 직영으로 설립되면서 기술전통을 앞시기의 수준으로 복원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조각장 분야의 첫 기능보유자였던 김정섭(金鼎燮)도 이곳에서 기술을 배양하였다. 현재는 그의 뒤를 이은 아들 김철주(金喆周)가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재료는 금·은·철·석(錫)··연(鉛)·아연 등으로 다양하나 이 가운데 은을 주로 썼기 때문에 공방의 명칭도 은방(銀房)으로 불렀으며, 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는 광교천(현재의 종로1가) 주변에 은방이 집중되어 있었다.

문양은 산수·화조·운룡(雲龍)과 당초문·문자문(文字文) 등이 일반적이며, 조선 말기 이후에는 특히 길상적 상징의미를 지닌 문양이 주류를 이룬다.

참고문헌

『중요무형문화재해설』-공예기술편-(문화재관리국, 1988)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연구」(최공호, 『고문화』 34,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88)
집필자
최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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