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과 농은 본래 형식이 달라, 층별로 분리되는 농과 옆널이 하나로 붙어 있는 장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의생활의 변화에 따라 농보다는 장이 널리 쓰이기 시작하였고, 뒤늦게 발달한 의걸이장의 예에서와 같이 수납가구가 장 중심으로 발달하면서 장 · 농의 명칭도 엄격한 구분이 사라졌다.
따라서 장롱의 명칭은 가구의 보통명사로서 자리잡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두 가지 가구를 합하여 ‘장’ 또는 ‘농’으로 통칭하는 경우마저 없지 않다. 이러한 용어상의 혼용 경향은, 반닫이와 장의 기능이 혼합된 이층 · 삼층 반닫이의 절충형식에서 보듯, 조선 말기 및 근대의 변화된 생활환경을 기반으로 새로운 기능의 창출이 요구되던 분위기에서 본래의 기능이 결합 또는 분리되는 등 전통 가구양식의 과도적 변화과정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장과 농은 양식상의 갈래를 달리하는데,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농은 본래 죽기(竹器)”라는 기록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초기의 농은 대나무와 싸리 · 버들가지 등을 엮어 만든 상자 형태, 즉 궤(櫃)의 형식에서 유래되었다. 이 궤가 서민가의 수장가구로서 폭넓게 기능하였음은 물론이다.
가구재가 목재로 바뀐 것은 얇은 판재를 켤 수 있는 부판용 톱의 개량에 따른 것이며, 이 무렵부터 장롱이 일반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농은 상자형의 궤를 두 세층으로 겹쳐 쌓은 후에도 기능적으로 쓸 수 있게 앞널에 문을 만든 데서 비롯되었으며, 장은 이러한 농의 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양측 널을 하나의 판재로 붙여 고정시킴으로써 보다 기능적으로 쓸 수 있게 한 진전된 형식이다.
1900년 전후의 근대기에는 장롱을 만드는 소목장(小木匠)이 운영하는 가구공방의 간판에 ‘粧籠(장롱)’이라는 표기도 눈에 띈다. 장과 농을 함께 진열한 이 공방에서 이처럼 표기한 것은 장식치레가 부가된 수장가구를 통칭하는 의미일 것이며, 앞 시기에 비하여 금구(金釦) 장식이 크고 화려해진 당시 가구양식의 특징과 함께, 이 무렵부터 이미 장과 농에 대한 용어상의 혼용 경향이 나타났음을 뒷받침해 준다.
오늘날의 가구는 농이 거의 사라지고 장 중심으로 다양하게 제작되고 있으나, 조선시대 가구의 우수한 전통이 창의적으로 계승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수용한 서구양식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