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원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형조참판, 형조판서,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시호문정(文靖)
  • 태시(泰始)
인물/전통 인물
  • 본관풍양(豊壤)
  • 사망 연도1822년(순조 22)
  • 성별남성
  • 주요 관직형조판서|한성판윤
  • 출생 연도1762년(영조 38)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박광용 (성심여자대학,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참판, 형조판서,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태시(泰始). 조한보(趙漢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정우(趙廷禹)이고, 아버지는 부사 조상존(趙象存)이며, 어머니는 윤근(尹勤)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90년(정조 14) 향시에서 수석을 하였으나, 호적이 누락되어 있어 제적되자 정조의 특명으로 부내에 집을 지었다. 1792년 친림 응제에서 거수를 하여 직부전시를 상으로 받고 1794년 유학으로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179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기주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면서 한림회권(翰林會圈 : 예문관검열을 뽑기 위해 예문관 전임 관원들이 피선자에게 낙점을 찍음)에 뽑히고 규장각 초계문신에 선발되는 등 정조의 특별한 배려를 받았다.

이 후 부교리·정언·지평 및 이조·병조 낭관을 거쳤고, 초계시(抄啓試)에서 세번 수석을 하여 4품에 오른 뒤 부안현령이 되었다. 1802년(순조 2) 승정원승지·대사간·이조참의·형조참의·자산부사가 되었고, 1809년 이후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의 참판을 거쳤으며, 1818년에 부사로서 연경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다음해 대사성을 거쳐 강화유수가 되어서는 세금감면·향약실시에 노력하였고, 1821년에 형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이 되었으며, 동지정사(冬至正使)로서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다음해 한성판윤 겸 지경연사(漢城判尹兼知經筵事)로 재직중 사망하였다. 성격이 밝으면서 부드럽고 깊이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독서에 전념하였고 안분순명(安分順命)을 규범으로 삼아 생활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 - 『정조실록(正祖實錄)』

  • - 『순조실록(純祖實錄)』

  •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경산집(經山集)』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