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생 김영학(金永學)을 회장으로 하여 1919년 3월 만주 연길현 국자가(延吉縣局子街)에서 조직,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발간하여 민족사상 고취에 주력하였다.
이 신문의 주필은 유하천(柳河天)이었고, 명동학교 또는 정동학교(正東學校) 등지에서 인쇄하였으며, 부수는 약 1,500부로 경비는 기부금으로 조달하였다. 회장 김영학이 김약연(金躍淵)·구춘선(具春先)·마진(馬晉) 등과 연변교민회(延邊僑民會)를 조직하여 1919년 3월 간도 용정(龍井)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초에 김영학은 유찬희(柳讚熙)·박경철(朴敬喆)·배형식(裵亨湜) 등과 함께 노령지방 동지와의 연락을 목적으로 노령으로 떠남으로써 이 단체도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