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여명(汝明), 호는 졸옹(拙翁). 평양부서윤 조준(趙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제용감부정 조응세(趙應世)이고, 아버지는 장악원첨정 조인(趙遴)이며, 어머니는 김세휘(金世輝)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예조좌랑·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1609년(선조 37)에 제주도에 흉년이 들자 구황어사로 제수되어 현지의 실상을 자세히 살펴본 후 방물(方物)의 경감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리고, 이어 국둔마(國屯馬)의 점열과 군관의 폐단에 관해 보고했다.
왕이 윤허하여 점마(點馬)의 담당은 명망이 있는 문신(文臣)으로 가려서 보내되 겸하여 민폐와 수령이 잘하는 지의 여부를 염탐하도록 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강직하여 광해군 때에 초야에 물러가 살면서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나 지조를 더욱 굳게 가졌다고 한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있었고, 자기 자신을 단속함에는 청고(淸苦)하였다고 하며, 그가 죽자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