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종진(宗鎭), 호는 염와(恬窩), 아버지는 조상순(趙尙純)이다.
일찍이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정조16년(1792) 안동 도산(陶山) 별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1804년(순조 4) 30세에 실명, 학업을 더 연마할 수 없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명문들을 잘 외우고 글씨를 잘 써서 해서·초서·예서·전서에 모두 뛰어났던 그는 실명의 아픔을 문학작품을 창작하며 극복했다. 「도산별곡(陶山別曲)」(일명 도산가)과 「개암정가(皆巖亭歌)」(일명 개암가) 및 지금은 전하지 않는 「연암곡(蓮庵曲)」을 지어서, 시인으로서 면모를 뚜렷이 드러냈다.
「도산별곡」은 조성신이 정조 16년(1792)에 실시된 도산별과에 응시하였을 때에 느낌 여러 가지 감정을 실명한 후에 지은 뛰어난 작품이다. 곡조가 맑고 우아하다고 평해진다.
「개암정가」는 그의 선조인 개암(皆巖)조일도(趙一道)의 정자였던 개암정에서 느낀 감회를 읊은 작품이다. 개암정 주변에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를 섬세하게 묘사한 사실적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문집으로 2권 1책의 『염와유고(恬窩遺稿)』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