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조식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그의 묘소를 비롯해서 산천재, 별묘, 신도비 및 재실 등이 있으며, 1984년 1월 26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조식(曺植, 1501~1572)의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남명(南冥)이다. 성리학의 대가로 일생동안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며 살았다. 이황(李滉), 성수침(成守琛)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 등 수백 명의 인물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북인(北人) 세력을 형성하였다.
조식의 유적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유적과 시천면 사리 유적 등 두 곳에 나뉘어 있다. 원리 유적은 최영경(崔永慶)·하항(河沆) 등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6년(선조 9) 창건한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는 곳이다.
덕천서원은 건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탔다. 1601년(선조 34)에 다시 세웠고 1609년(광해군 1)에 사액을 받았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철폐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2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서원 안에 정면 5칸, 측면 2칸반인 ‘경의당(敬義堂)’이란 이름의 강당이 있다. 뒤편에는 제향공간을 배치하였다. 입구에 삼문을 세웠고, 좌우로 담장을 둘렀다. 삼문 안에는 ‘숭덕사(崇德祠)’라 이름한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또 서원 남쪽의 냇가에는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덕천서원의 유생들이 쉬던 곳으로 1585년(선조 18)에 처음 세워졌다. 지금의 건물은 최근에 다시 세운 것이다.
사리 유적은 조식이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정진하던 산천재(山天齋)와 별묘(別廟), 조식의 묘소, 신도비 및 재실 등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산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구들과 마루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조식이 처음 이곳으로 옮겨오던 1561년(명종 16)에 만들어졌다. 이 건물은 1584년(선조 17)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18년(순조 18)에 다시 세워졌다. 부근에는 종가에서 불천위 조식을 모시기 위해 지은 별묘와 재실이 있다.
조식의 묘소에는 성수침의 아들 성혼(成渾)의 글을 새긴 묘비와 석물이 있다. 봉분은 호석을 두르지 않았고, 뒤에는 자연석을 쌓아올린 곡장이 얕게 둘러져 있다. 망주석은 원래의 것으로 추정되나, 상석은 근래의 것이다. 봉분 옆 묘갈명은 한글로 번역해서 새긴 최근의 것이다. 원래의 묘갈은 봉분이 있는 곳의 석축 아래에 세워져 있다.
묘소 아래 길가에 있는 신도비는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었고, 이조판서 김성근(金盛根)이 쓴 전액(篆額)과 이조참판 김학수(金鶴洙)가 쓴 글씨로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