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사필(士弼). 직장(直長) 조형(趙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상변(趙相抃)이고, 아버지는 조기수(趙祺壽)이며, 어머니는 인평대군(麟坪大君)요(㴭)의 딸이다.
1705년(숙종 31) 진사가 되고, 그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09년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 해안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연변수령(沿邊守令)은 무신으로 할 것과 변장(邊將)들에게 늠료(廩料: 官費로 쓸 財貨)를 넉넉하게 지급하여 방군수포(放軍收布 : 身布를 받고 軍役을 면제하여 줌)의 폐를 막도록 상소하였다.
1711년 문학, 1714년 정언, 이듬해 사서를 거쳐 1716년 다시 지평이 되었다. 이 때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에 윤증(尹拯)을 비난한 권상하(權尙夏)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1720년 경종 즉위 후에는 잠시 이조좌랑에 재직한 것을 제외하고 4년 동안 지평·정언·수찬·부교리·헌납 등 주로 삼사의 언관(言官)을 역임하고 1724년(경종 4)에는 사간에 올랐다.
이 해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 4대신의 옥사(獄事) 때 삼사의 언관직에 있으면서 이를 제지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대사간 유명응(兪明凝), 정언 유엄(柳儼), 부제학 박필몽(朴弼夢), 응교 조최수(趙最壽), 부수찬 신치운(申致雲), 교리 윤용(尹容) 등과 함께 파직당하였다.
1727년(영조 3)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의 변호로 복직되어 보덕(輔德)이 되었으며, 1729년윤순(尹淳)·권일형(權一衡)과 같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