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여호(汝豪), 호는 한수(漢叟)·죽천(竹川). 조수견(趙壽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방보(趙邦俌)이고, 아버지는 조충수(趙忠秀)이며, 어머니는 양윤형(梁允亨)의 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史官)으로 등용되었으며, 1586년 사정으로서 다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예문관·홍문관에 등용되고, 이어 수찬·교리를 거쳐 정언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덕으로 세자를 호종(扈從)하였고, 그 뒤 전적·필선을 거쳐 회양부사·광주목사(廣州牧使)·남양부사·안변부사로 나아갔다. 그 뒤 호조판서·대사간·동부승지·부제학·동지중추부사·대사성, 이조·호조·형조의 참판 및 지의금부사·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01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판윤이 되고, 1609년 형조판서로 또 다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우참찬·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였고, 형난공신(亨難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한천군(漢川君)에 봉해졌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광해군을 가리켜 ‘전주(前主)’라 하였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였고, 이어 광해군 때 공신이 되었다는 죄목이 가중되어 1628년 해남에 유배, 풍토병에 시달리다가 이듬해 죽었다.
1675년(숙종 1)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고, 저서로는 『동사보유(東史補遺)』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