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일지(一之), 호는 수헌(睡軒). 조방주(趙邦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위(趙褘)이고, 아버지는 평강현감 조덕년(趙德年)이며, 어머니는 현감 김양좌(金良佐)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 홍문관에 등용되고, 1612년(광해군 4) 사서가 되었다가 문학으로 전직되었으며, 통훈(通訓)으로 승품되면서 교리로 세자시강원의 사서를 겸하였다.
이어서 사헌부로 자리를 옮겨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배대유(裵大維)와 광해군의 세자위를 반대하였던 유영경(柳永慶)을 처형하라는 탄핵소를 올렸다. 이듬해 다시 정언이 되어 서인을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 1614년(광해군 6) 헌납을 거쳐 지평 겸 사서가 되었다.
대사간 유경종(柳慶宗)과 함께 우통례(右通禮) 이극신(李克信)의 패악(悖惡)을 탄핵하였고, 또한 대사간 정항(鄭沆)과 함께 정온(鄭蘊)의 죄를 탄핵하였다.
그 뒤 사인이 되었다가, 정국이 점차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내놓고 근신하였다.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가 지난날 재직시에 서인들을 탄핵한 사실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 선조의 계비)를 폐하여 서궁(西宮: 덕수궁)에 가두는 데 동조하였다는 죄목으로 은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한 관원이었다. 한때 서인을 억누르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합법적으로 즉위한 임금에 대하여 부질없는 명분을 내세워 왕위를 위협하는 무리들을 직책상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