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둥(廣東)혁명청년회·우창(武昌)혁명청년회·북경(北京)한인청년회·상해한인청년회 등의 대표들이 모여 결성하였다. 중국본토 및 만주지방에 있는 모든 한인청년조직을 총망라하는 유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1927년 11월 8일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조선청년운동의 총본영인 조선청년총동맹의 1지대(支隊)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만주청년단체와 제휴해 속히 중국한인청년총기관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조선의 독립과 세계혁명이론 및 실질적인 전술의 수립을 꾀한다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중앙집행위원장 및 정치·문화부 담당에 김기진(金基鎭), 서무부에 이관수(李寬洙)·정태희(鄭泰熙), 재무부에 엄항섭(嚴恒燮), 선전·조직부에 정원(鄭遠), 조사부에 안우(安愚) 등이 선임되었다. 결국 이 대회의 결의에 의해 정원을 1928년 1월 만주로 파견해 만주의 각 청년단체들과 접촉하게 하였다.
마침 만주에서도 이미 1927년 8월에 해림(海林)에서 개최한 남북청년단체대표협의회 이래 통합운동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전중국의 한인청년운동기관을 결성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이에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소속 정원과 남만청년총동맹 집행위원장인 한철(韓哲)이 창립을 준비하여 1928년 4월 발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북만청년총동맹·남만청년총동맹·송강(淞江)청년총동맹·합장(哈長)청년동맹·여신(麗新)청년동맹·동만청년총동맹 등과 더불어 같은 해 5월 재중국한인청년동맹을 결성, 이에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