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대동 출신. 1919년 3·1운동 당시 유혈 참극의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인 사천(沙川) 시위운동의 주동인물로 활약하였다.
이 참변이 일어난 현장은 강서군 반석면이지만, 그 발단은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원장리(院場里)에서 시작되었다. 지석용은 금제면에 합성학교(合成學校)를 설립하고 원장교회 전도사로서 민족운동을 선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반석교회 장로 조진탁(曺振鐸)이 평양시위운동에 참석한 뒤 독립선언서를 소지하고 귀향하던 도중 원장리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를 전하면서 합동거사를 결의하였다.
3월 4일 사천장터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군중을 주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시위준비 중 구속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하여 헌병주재소로 향하였다.
시위군중의 선두가 사천장터 초입에 당도하였을 때 일제헌병들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흥분한 시위군중은 헌병주재소장과 보조원을 살해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일본경찰은 즉시 보복행동을 개시하여 무차별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때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피신하였지만, 같은 해 8월 평양복심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뒤 1933년 12월 중국 무순(撫順)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대련(大連)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1935년 6월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살인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8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