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용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지석용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지석용 전후면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1년(고종 18)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평안남도 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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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평안남도 대동 출신. 1919년 3·1운동 당시 유혈 참극의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인 사천(沙川) 시위운동의 주동인물로 활약하였다.

이 참변이 일어난 현장은 강서군 반석면이지만, 그 발단은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원장리(院場里)에서 시작되었다. 지석용은 금제면에 합성학교(合成學校)를 설립하고 원장교회 전도사로서 민족운동을 선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반석교회 장로 조진탁(曺振鐸)이 평양시위운동에 참석한 뒤 독립선언서를 소지하고 귀향하던 도중 원장리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를 전하면서 합동거사를 결의하였다.

3월 4일 사천장터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군중을 주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시위준비 중 구속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하여 헌병주재소로 향하였다.

시위군중의 선두가 사천장터 초입에 당도하였을 때 일제헌병들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흥분한 시위군중은 헌병주재소장과 보조원을 살해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일본경찰은 즉시 보복행동을 개시하여 무차별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때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피신하였지만, 같은 해 8월 평양복심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뒤 1933년 12월 중국 무순(撫順)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대련(大連)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1935년 6월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살인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8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9(국가보훈처, 1991)
『독립운동사자료집』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독립운동사』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동아일보(東亞日報)』(1934.1.21, 1935.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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