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사술(士述). 호는 기천(岐川). 보령 출생. 대제학 채유후(蔡裕後)의 5대손이며, 채수윤(蔡壽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채응조(蔡應祖)이고, 아버지는 채의공(蔡義恭)이며, 어머니는 이은신(李殷臣)의 딸이다.
1761년(영조 37) 26세로 진사가 되었고, 176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을 거쳐 승정원주서가 되었고, 1771년 이후에는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응교, 사헌부집의를 거쳐 승정원승지를 역임하였는데, 이 때 영조가 견식이 뛰어남을 인정하였다.
정조 연간에 들어와서는 목만중(睦萬中)·홍의호(洪義浩) 형제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노론 세력과 연결되어 채제공(蔡濟恭)·이가환(李家煥) 중심의 남인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존재하였다.
이 동안 사간원대사간, 예조·호조·형조의 참판,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형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파주목사·양주목사·강원감사·강화유수 등의 요직을 담당하였다.
1806년(순조 6)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이 해에 사망하자 봉조하(奉朝賀)의 직함이 내렸다. 세속에 초연하여 길인(吉人)이라고 받들어졌다. 당시 문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존여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