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홍리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양주목사, 강원감사, 강화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기천(岐川)
  • 사술(士述)
인물/전통 인물
  • 본관평강(平康)
  • 사망 연도1806년(순조 6)
  • 성별남성
  • 주요 관직강화유수
  • 출생 연도1737년(영조 13)
  • 출생지보령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박광용 (성심여자대학,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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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양주목사, 강원감사, 강화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사술(士述). 호는 기천(岐川). 보령 출생. 대제학 채유후(蔡裕後)의 5대손이며, 채수윤(蔡壽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채응조(蔡應祖)이고, 아버지는 채의공(蔡義恭)이며, 어머니는 이은신(李殷臣)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61년(영조 37) 26세로 진사가 되었고, 176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을 거쳐 승정원주서가 되었고, 1771년 이후에는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응교, 사헌부집의를 거쳐 승정원승지를 역임하였는데, 이 때 영조가 견식이 뛰어남을 인정하였다.

정조 연간에 들어와서는 목만중(睦萬中)·홍의호(洪義浩) 형제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노론 세력과 연결되어 채제공(蔡濟恭)·이가환(李家煥) 중심의 남인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존재하였다.

이 동안 사간원대사간, 예조·호조·형조의 참판,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형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파주목사·양주목사·강원감사·강화유수 등의 요직을 담당하였다.

1806년(순조 6)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이 해에 사망하자 봉조하(奉朝賀)의 직함이 내렸다. 세속에 초연하여 길인(吉人)이라고 받들어졌다. 당시 문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존여부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 『영조실록(英祖實錄)』

  • - 『정조실록(正祖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청선고(淸選考)』

  • - 『여와문집(餘窩文集)』

  •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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