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홍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양주목사, 강원감사, 강화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술(士述)
기천(岐川)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37년(영조 13)
사망 연도
1806년(순조 6)
본관
평강(平康)
출생지
보령
주요 관직
강화유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양주목사, 강원감사, 강화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사술(士述). 호는 기천(岐川). 보령 출생. 대제학 채유후(蔡裕後)의 5대손이며, 채수윤(蔡壽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채응조(蔡應祖)이고, 아버지는 채의공(蔡義恭)이며, 어머니는 이은신(李殷臣)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61년(영조 37) 26세로 진사가 되었고, 176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을 거쳐 승정원주서가 되었고, 1771년 이후에는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응교, 사헌부집의를 거쳐 승정원승지를 역임하였는데, 이 때 영조가 견식이 뛰어남을 인정하였다.

정조 연간에 들어와서는 목만중(睦萬中)·홍의호(洪義浩) 형제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노론 세력과 연결되어 채제공(蔡濟恭)·이가환(李家煥) 중심의 남인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존재하였다.

이 동안 사간원대사간, 예조·호조·형조의 참판,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형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파주목사·양주목사·강원감사·강화유수 등의 요직을 담당하였다.

1806년(순조 6)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이 해에 사망하자 봉조하(奉朝賀)의 직함이 내렸다. 세속에 초연하여 길인(吉人)이라고 받들어졌다. 당시 문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존여부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여와문집(餘窩文集)』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