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선(海月仙) 부경순은 1900년 제주도 북제주군(현재의 제주시)에서 태어나 21세 때 남편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살았다. 46세 때 8·15광복을 맞아 귀국 도중 해상에서 해적을 만나 남편과 자식들은 살해당하고 두 명의 남은 자식과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생겼으며 아들은 중병에 걸렸다. 그러던 중 마침 부산 영도에서 물법치료를 하고 있던 김봉남을 찾아가 병을 완치하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녀는 열심히 봉남교를 포교하는 한편, 스스로 주문을 외는 수련을 계속하여 환각을 자주 보거나 토설(吐說)을 하는 일도 있었다.
부경순의 신앙이 김봉남의 가르침에 의지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무당과 같이 강신 상태에서 토설을 하는 경우가 있어 김봉남의 주의를 받기도 하였다. 이것이 신도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정과 추앙을 받게 되고, 또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독자적으로 창교하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1950년 김봉남이 사망하자, 1952년 병을 치료하던 손님 50여 명을 모아 부산 남항동 자기집에서 천지대안도를 창립하였다.
1954년 부경순의 토설(吐說)이 열렸다는 소문이 퍼지며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었고, 교명을 잠시 신천지대안도라고 하다가 다시 천지대안교로 고쳤다.
그리고 부경순은 김봉남의 도는 선천시대의 운도에 속하기 때문에 불로 다스려야하는 운세였는데 물법을 썼기 때문에 천명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면서 봉남교와의 인연을 일체 단절하였다. 그리고 물의 운도[水運]를 따르는 여성 중심의 후천세계(後天世界)를 주장한다. 이에 신자들은 거의 다 여성이다.
1956년 부경순은 충청남도 논산시 두마면 부남리(계룡산 신도안)로 옮겨가서 계룡산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이며 천지인(天地人) 삼합운수(三合運數)와 삼재운수(三災運數)가 열리는 새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곳에 새천지 개벽운수를 개척하여 만대 후손에게 감로의 혜택을 받는 새 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말하였다.
1965년 부경순이 사망하자 김태순(金泰順)이 대를 이어 교를 이끌다가, 1984년 신도안 민간인 철거계획에 따라 논산시 두마면 암사리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충청남도 계룡시 용산리 용정 삼거리, 이른바 양정고개에 본부를 두고 있다.
전국에 24개의 교당(제주도에 18개)을 갖고 있으며, 일본 오사카(大阪)에도 2개의 교당이 있다. 한 때는 신도가 3,000여 명에 달했으나, 현재는 약 500명 정도이다. 신도들은 대개 제주도에 많으며 충청 지역에 소수의 신도들이 있다. 매우 폐쇄적인 교단 운영을 하고 있어 외부인의 방문을 극히 꺼리는 형편이다.
신앙의 대상은 해월선으로, 해월선은 바로 옥황상제(玉皇上帝)이며 미륵세존(彌勒世尊)으로서 신천지오만년운도(新天地五萬年運度)를 만들었고, 신천지를 개벽한 개벽주이며 미래불용화주(未來佛龍華主)라고 한다. 또한 해월선은 용왕신(龍王神)으로도 받들어진다.
여기서는 찬물만 먹고 단식하며, 축문·기도문을 외우면 병도 낫고 정신수련도 된다고 가르친다. 매일 새벽 정기대제를 지내며, 매월 5일·15일·25일과 연 세 차례의 대기념행사가 있다.
의례 행사 때에는 흰 의복을 입으며, 여자는 둥근 모양의 노란 모자를 쓰고 남자는 모가 난 노란 관을 쓴다. 또 여자는 노란색의 둥근 방석을 깔고 앉으며 남자는 하얀 방석에 앉는다.
주문을 계속 외우면 강신이 되고 통령이 되어 몸이 흔들리고 귀신을 볼 수도 있게 되며 토설이 나오고 계시도 받게 된다고 가르친다. 경전으로는 1961년에 김태순이 부경순과 자신의 토설을 정리하여 펴낸 『계운전(啓運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