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아명은 성문(聖文). 호는 한산(漢山). 황해도 재령 출신. 아버지는 최인석(崔仁錫)이며, 어머니는 오해주(吳海州)로 5남매 중 막내이다. 형과 세 누이가 있었으나 형은 상해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고, 두 누이는 어려서 죽고, 누이 화옥(花玉)과 남매만 남았다.
29세에 이득삼(李得三)과 혼인, 덕성소학교를 졸업하고, 신천농업학교를 다니다 가세가 기울자 중퇴하고 사회에 뛰어들었다. 사리원에서 정미소 · 제유소 등을 운영하다 광복이 되자 가산을 정리하여 월남하였다.
1946년 세계고무주식회사를 인수하여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하였으나 6 · 25전쟁의 발발로 부산으로 피난가서 부산에서 세기상사를 설립하여 미군부대 군납으로 터전을 잡았다. 당시 군납으로 60만 달러의 외화를 획득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밀가루 수입권을 얻었다.
조선제분을 인수, 경영하다 동업자에게 넘겨주고, 1955년 관재처로부터 부산제빙냉장(釜山製氷冷藏)을 불하받아 제빙 · 냉동 · 창고업 외에도 수산물 생산을 위하여 저인망 어선을 구입, 본격적으로 수산물가공업에 착수하였다.
이 사업은 기업의 내실을 다지게 해 주었고, 또 기업확장과 그룹기업으로 발전할 발판을 굳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고려수산(高麗水産) · 삼양제분(三洋製粉)을 인수, 경영하다 처분하여 그 자금으로 조선제분을 인수, 상호를 동아제분(東亞製粉)으로 바꾸었다.
동아제분에서는 쌀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하여 영양가 높은 밀쌀을 개발하였으나, 소비자들의 호응을 못 얻어 실패로 돌아가자 제분업계 공동으로 옥분(玉粉)을 개발, 외화절약에 크게 기여하였다.
1967년 제분협회 회장에 취임, 제분회관건립, 제분업계의 시설과잉 해소를 위한 자체정비 등 큰 업적을 남겼다. 1969년에 대한생명보험(大韓生命保險) · 대한플라스틱공업 · 공영화학 등 부실기업을 인수, 사업영역을 확대하는 한편, 총력을 경주하여 인수 2년 만에 3개 부실기업을 정상궤도에 올려 놓았다.
뛰어난 경영업적을 인정받아 1970년 보험의 날에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72년 상공의 날에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동향인 가운데 가난한 집 자녀들에게 학비를 도와 주기 위하여 사리원장학회를 설립한 것을 비롯, 어린이회관 건립기금, 안중근(安重根)의사 동상 및 기념관 건립기금, 김대건(金大建) 신부동상 건립기금 등 애국선열에 대한 추모사업과 어린이관련 사업 등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대한제분협회 회장, 한국사료협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여 업계활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