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성 ()

경제
인물
해방 이후 성창기업, 한국요업, 반도목재 등을 설립한 기업인.
이칭
만오, 晩悟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9년(고종 36)
사망 연도
1986년
본관
동래(東萊)
출생지
경상북도 영주시
관련 사건
성창학원(盛昌學園) 설립
정의
해방 이후 성창기업, 한국요업, 반도목재 등을 설립한 기업인.
개설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만오(晩悟). 경상북도 영주 출신. 아버지는 정석주(鄭錫周)이며, 어머니는 김사일(金沙一)이다. 1910년에 영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림학교(大邱農林學校)에 진학하였다.

이 때 정한표(鄭漢表) 교사의 애림사상(愛林思想)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것이 후일 그가 합판생산업자로 대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8년 임봉은(林鳳隱)과 결혼하였고, 해덕(海德)·해수(海秀)·해찬(海燦)·해린(海鱗) 등 4남 3녀를 두었다. 1917년 아버지와 함께 경영하던 정미업체 이름을 성창(盛昌)이라 정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성창 역사의 출발점이 된 셈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935년 아버지의 권유로 경상북도 봉화로 이주, 조림사업에 착수하였다. 성창임업(盛昌林業)을 시작할 때의 목표 가운데에는 제재와 목재업 뿐만 아니라 조림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8년 9월 성창기업(盛昌企業)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합판공장을 시작하였다.

6·25전쟁 중에 폐허가 된 공장을 재건하여 합판을 생산하였지만, 일본산 합판이 수입되어 품질향상에 노력하지 않으면 파국을 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1952년부터 정부가 외국산 원목수입을 개방함으로써 합판품질은 일본제품을 능가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1958년 국내 최초로 미국시장에 합판을 수출하였고, 1962년 국내 최초의 포르말린공장을 신설하였으며, 1966년 국내 최초로 프린트합판 및 화장합판공장을 신설하는 등 합판수출붐을 주도하였다.

성창기업이 궤도에 오르자, 1959년 선창산업(鮮昌産業)을 설립하였고, 1967년 한국요업(韓國窯業)을 설립, 국내 최초로 내장타일 수출을 개시하였다. 1969년 반도목재(半島木材)를 설립, 베니어합판 및 미장합판을 생산, 수출할 뿐만 아니라, 해운업 및 국내외 선박대리업으로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그는 또한 육영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44년 말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가 경영위기에 처하였을 때 5만 원을 출연, 학교구출운동에 참여하였고, 1956년 경북대학교후원회가 설립되자 이사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77년 성창학원(盛昌學園)을 설립, 산하에 성지중학교(盛智中學校)와 성지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전문기술의 양성을 위하여 1977년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동 일대 3만여 평에 교사를 신축하고 성지공업전문학교(盛智工業專門學校)를 개교하였다.

그 밖에 YMCA회장, 부산 아동자선병원 이사장 등 사회사업에도 관여하였다.

참고문헌

원로기업인편, 『재계회고』6(한국일보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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