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말기에 어린 나이로 내시부(內侍府)에 선입되었다. 이후 내시부의 각급 관직을 역임하고 1431년(세종 13)경 지내시부사(知內侍府事)에 제수되고, 1449년경에는 장관직인 판내시부사에까지 승진하였다.
1453년(단종 1)경에는 행동판내시부사에 체직되고, 계유정변(癸酉政變)에 기여한 공으로 전지가 사급되기도 하였다. 1455년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종하고, 문종흉서 이래로 궁중 내의 일을 전횡하였다.”고 논죄되면서 고신(告身)을 몰수당하고 출신지에 부처되었다.
곧 대간(臺諫)의 가죄(加罪)요청에 따라 변방의 관노(官奴)에 영속(永續)되면서 가산을 적몰(籍沒)당하였다. 1468년(세조 14) 세조의 중병치료를 구하기 위한 대사(大赦)에 따라 사면되면서 고신을 돌려 받고, 곧 복직되었다.
1482년(성종 13) 나이 70이 넘고 환관 중 가장 나이가 많다 하여 특별히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서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가 졸하였다. 기민하고 영민한 자질로 시종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국왕의 최측근에 위치하면서 장기간 국왕과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 및 백사(百司), 백관(百官) 간에 오가는 각종 명령을 전달하는 승전색(承傳色)의 직임을 수행하고 내시부를 지휘하였다.
동시에 1444년과 1449년에 각각 충청·전라도 등지에 파견되어 그 도의 관찰사(觀察使)와 함께 대군(大君)의 배우자를 간선(揀選)하는가 하면, 1450년(문종 즉위)∼1452년(문종 2)과 1453년(단종 즉위)에 걸쳐 각각 시릉(侍陵) 환관이 되어 세종릉과 문종릉을 수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