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아버지는 대호군 최종(崔淙)이다.
일찍이 군문에 입대한 뒤 홍건적과 왜구들을 물리쳐 큰 전공을 세웠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군의 장수로 출전했다가 이성계(李成桂)를 추종, 회군하는 등 이성계의 집권에 공헌하였다. 고려 말에는 추신(樞臣)에까지 승진하였다.
1392년(태조 1)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서북면에 파견되어 개국 초의 민심을 위무하였다. 이 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문하시랑찬성사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2월부터 6월에 걸쳐 ‘조선’의 국호를 내려준 것에 감사하는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해 1388년 위화도회군 때의 공으로 다시 회군공신 1등에 책록되면서 수양군(首陽君)에 봉군되었으며, 다시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에 개수(改授)되었다. 1394년 안주·의주·이성·강계 등의 병마도절제사 겸 안주목사로 파견되어 북변을 방어했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 입조하였다.
같은 해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자 분도평의사사사(分都評議使司事)가 되어 개성에 잔류하면서 천도 후의 민심을 위무하고 행정을 맡았다. 1397년 12월부터 이듬해 5월에 걸쳐 서북면도안무찰리사와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평양윤으로 북변 방어를 위한 평양성의 축조를 감독했고, 돌아와 판삼사사가 되었다.
1400년(정조 2) 판삼사사로서 치사(致仕)했으나, 사헌부로부터 “평양성 축조 감독시에 역도(役徒)들이 상대(上代)의 묘석을 발굴하여 축성한 일을 묵인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논죄되었다. 그러나 정종의 비호로 해주에 유배됨에 그쳤고, 곧 방환되었다.
천성이 강직하여 세도에 굴하지 않았다. 비록 학문을 익히지는 못했으나 오성(悟性)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무 처리시에는 막료에게 문서를 읽게 한 뒤 사리를 분별하여 명쾌히 처결하였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