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생.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6년 중국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육군 간부로서 활약하는 한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상해(上海)·북경(北京)·봉천(奉天)·안동(安東)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격화되고, 전쟁에 항공기가 출현하자, 장차 전쟁의 승패는 공군력에 의하여 좌우될 것임을 통찰하여 1920년 중국공군군관학교에 입학, 수학한 뒤 이 학교 교관, 중국수상비행대장, 중국공군지휘부 참모장 겸 공군기지사령관, 중국공군기지학교장 등을 역임하고 1940년에는 중국육군대학을 이수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군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하여 초치되어 1940∼1946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항공건설위원회주임, 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장·참모처장·사령관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8·15광복 후 1946년에 귀국하여 한국항공건설협회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국내 항공계 출신 동지들을 규합하여 항공계 건설에 노력하였는데, 특히 김정렬(金貞烈)·장덕창·박범집 등과 함께 군 항공부대 창설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육군항공부대 창설간부의 일원으로서 1948년 1월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 육군소위로 임관되었다가, 그 해 6월 대위로 특진하여 육군항공기지 부대장으로 취임하여 항공전력향상에 진력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동시에 초대 국방부차관으로 임명되어 국방력 건설에 힘쓰는 한편, 공군의 독립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공군이 육군으로부터 독립한 다음해인 1950년 5월 공군준장으로 승진됨과 동시에 공군에 복귀하여 공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김포지구경비사령관, 공군근무부대장, 공군후방사령관, 항공기지사령관, 공군본부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52년 제2대 공군참모총장(공군중장)으로 취임하였다.
재직 중 공군의 전력증강과 현대화에 크게 공헌하는 한편, ‘공군의 전통’·‘공군가’ 등을 제정하여 공군의 지표를 명시하였다. 1954년 12월 공군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공군참모총장 고문으로서 공군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